일러스트=박상훈

독일 청년 허버트 크로머는 24세 나이에 괴팅겐대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받은 천재였다. 하지만 전후 독일에서 박사 후 연구원이 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고, 간신히 1952년 우정청 연구소에 일자리를 얻었다. 통신 실험 전문가인 동료들은 장비 근처에 얼씬도 못 하게 했다. 입만 열면 엉뚱한 아이디어를 떠드는 크로머가 장비를 망가뜨릴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과학계의 가장 큰 화두는 반도체였다. 5년 전 미국 벨 연구소가 트랜지스터 구조를 발명했지만, 속도가 너무 느렸다. 크로머는 반도체에 불순물을 도입하고, 여러 재료를 활용하면 트랜지스터의 효율과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고 여겼다. 상식에 어긋나는 젊은 연구원의 이론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었다. 크로머의 논문에 담겼던 ‘도핑’과 ‘헤테로구조(이종 접합)’, 적층 기술이 반도체 공정의 핵심이 된 것은 수십년 뒤였다. 이후 실리콘밸리의 전자기 장비 회사 베리안 어소시에이츠로 이직한 크로머는 자신의 헤테로 구조 아이디어를 활용하면 품질 높은 레이저 다이오드(반도체 레이저)를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레이저 다이오드는 바코드 스캐너, CD 플레이어에서 볼 수 있는 빛을 발생시킨다. 휴대전화, 위성통신, 광섬유, LED 조명 역시 레이저 다이오드가 핵심이다. 2000년 노벨위원회는 그를 물리학상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현대 기술의 토대를 마련한 인물”이라고 했다.

크로머가 레이저 다이오드 연구에 매달리던 1964년 영국 에든버러대의 물리학자는 전혀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다. 만물을 구성하는 입자와 힘이 어떻게 만들어졌나를 연구하던 35세의 피터 힉스는 다른 입자에 질량을 부여한 에너지 장을 만드는 새로운 입자의 개념을 떠올렸다. 그가 논문을 발표했을 무렵 물리학자 5명이 거의 같은 아이디어를 내놓았고, 그 중 두 사람의 논문은 힉스보다 7주 앞섰다. 힉스는 “먼저 누군가 논문을 썼다는 것을 알았다면 난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었다. 힉스는 은둔의 과학자였다. 미지의 입자에 자신의 이름이 붙었지만, 이 논문 이외엔 평생 별다른 연구 성과도 없었다. 힉스는 “난 근본적으로 무능한 사람이었고, 물리학은 내가 따라잡을 수 없는 영역으로 가고 있었다”고 했다. 힉스가 에든버러대에서 은퇴하고 명예교수 직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80년 노벨 물리학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2012년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에서 힉스 입자가 입증되자 이듬해 힉스는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됐다.

크로머와 힉스, 두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의 부음이 잇따라 전해졌다. 공학 기술의 발전을 이끈 크로머와 자연의 근본을 탐구한 힉스는 물리학자라는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다만 과학을 대하는 자세만은 놀랄 만큼 닮았다. 크로머는 “연구 아이디어에 대해 ‘어디에 쓸 수 있는가’를 물어보는 것은 의미 없는 일”이라고 했다. 원리를 파고들다 보면 자연스럽게 새로운 발명이나 성과가 따라온다는 것이다. 힉스는 2013년 강연에서 “힉스 입자가 실제 발견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가 연구하던 시절에는 우주 환경 초기를 재현하는 거대 장치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이었다. 입증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힉스와 다른 과학자들이 답조차 찾지 않았다면 현대물리학은 훨씬 뒤에 있었을 수 있다.

2007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알베르 페르가 1980년대 물리학 현상으로 발견한 거대자기저항(GMR)은 1997년 IBM이 하드디스크를 상용화하면서 빛을 발했다. 스마트폰 카메라 핵심 부품인 고체촬상소자(CCD)를 발명한 윌러드 보일은 2009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 연설에서 “내 연구가 나를 가장 감동시킨 순간은 화성 탐사선이 CCD로 찍은 화성 표면을 봤을 때”라고 했다. 보일의 CCD 발명이 1969년이었으니 화성 탐사와 연결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인류를 더 높이 도약하게 한 것은 목적을 정해준 연구가 아니라, 남들이 하지 않는 분야를 개척하겠다는 과학자의 호기심이었다. 연구·개발(R&D) 예산 삭감과 효율화 논란이 뜨거운 한국은 노벨상의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