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개봉한 할리우드 영화 'HER' 스틸컷

SF 영화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몇 년 전 개봉했던 ‘그녀(HER)’를 기억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너무나도 가식화되어버린 멀지 않은 미래 세상. 인공지능 파트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주인공은 지금까지 다른 사람들과는 느낄 수 없었던 친근감과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생성형 인공지능 덕분에 기계가 세상을 알아보고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 그런데 인간은 정말 기계와 진심 어린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인간은 기계를 진정한 대화 상대로 인정하고 신뢰할 수 있을까? 1966년 ELIZA라는 초창기 챗봇을 개발한 조셉 바이젠바움 MIT 교수는 놀라운 경험을 한다. ELIZA는 사실 사용자가 입력한 질문을 그럴싸하게 되묻기만 하는데도 사람들은 사적인 문제와 고민을 논의하고 도움까지 요청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미국 국방부에서도 몇 년 전 정신적 트라우마를 가진 군인들을 대상으로 기계 상담사와 심리 치료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설정된 실험을 진행한 적이 있다. 생성형 인공지능이 없었던 시대였기에 ‘기계 상담사’라는 명칭으로 사실 사람 상담사가 대화를 이끌었다. 결과는 흥미로웠다. 상대가 기계라고 믿었던 군인들은 상대가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보다 훨씬 더 오래, 그리고 훨씬 더 개인적인 내용들을 이야기한다. 기계와의 개인적 대화를 꺼려할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인간은 사람들보다 기계와의 대화를 더 선호한다는 해석을 해볼 수 있겠다.

진화론적으로 인간에게 타인은 언제나 잠재적 경쟁자이다. 나에 대한 사적인 정보를 많이 알수록 더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덕분에 우리는 잠재적 경쟁자인 다른 사람보다 기계를 더 안심하고 신뢰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자.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기계는 나에 대해 더 많은 걸 알게 된다. 나의 선호도, 나의 두려움, 나의 약점을 그 누구보다 자세하게 알게 될 생성형 인공지능 챗봇이야말로 나를 가장 잘 유혹하고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존재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