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7년 인조의 항복을 받은 만주인들은 왜 조선을 점령하지 않고 떠났을까? 첫째, 당시 조선에서 천연두가 유행했기 때문에 서둘러 조선을 떠났다는 해석이 있다. 둘째, 몽골인들과 달리 만주인들은 적어도 당시까지는 한반도를 발판 삼아 일본 정복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셋째, 역시 가장 중요한 이유는 홍타이지가 그의 아버지 누르하치의 뜻을 따라 명나라 정복에 집중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누르하치(1559~1626)는 1618년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했었다. 자신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명나라 요동총병관 이성량(李成梁)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첫 번째 개전 사유였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선전포고에서 더 많이 언급한 것은 만-한 경계 지역에 거주했던 예허(葉赫) 만주인 문제였다. 누르하치의 부인 몽오저저가 29세로 요절한 1603년 이후 예허는 누르하치와의 동맹을 깼고, 명나라와 함께 누르하치를 위협했다.

흰말을 탄 청 황제 - 건륭제(강희제의 손자)가 금색 갑옷을 입고 팔기군을 사열하는 장면을 묘사한 건륭대열도. 50만명이 안되는 만주인이 1000만 조선인과 1억 한인을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은 팔기에서 나왔다. 만주인 고유 사냥 조직을 기초로 몽골인 군사 조직을 결합했다. 청나라 중앙군이었던 8개의 집단과 이들을 깃발의 색깔로 구분해 팔기라는 명칭이 정착됐다. 청 궁정화가였던 예수회 출신 이탈리아 화가 주세페 카스틸리오네의 작품. /글항아리

1644년, 북경을 점령한 만주인들

1637년 조선과 정축화약을 체결한 만주인들은 1644년 마침내 만리장성을 넘었다. 약 50만명이 안 되는 만주인들이 약 1천만 명이 넘는 조선인들과 약 1억명이 넘는 한인들을 정복할 수 있었던 힘은 팔기(八旗)로부터 나왔다. 만주인들 고유의 사냥 조직을 기초로 몽골인들의 군사 조직을 결합한 팔기는 무사들과 식솔들을 운명 공동체로 묶어 놓은 것이었다.

팔기를 중심으로 단결한 만주인들에 비해 한인들은 분열했다. 북경은 만주인들이 점령하기에 앞서 이자성이 이끄는 한인 농민군들이 장악했다. 숭정제는 이들에게 쫓겨 자금성 뒤 매산(현재 경산)에서 자결했다. 만주인들은 산해관을 방어하고 있다가 이자성의 배후 공격을 받게 된 한인 장군 오삼계(吳三桂·1612~1678)를 회유하여 만리장성을 넘었다. 그런데 북경을 점령한 만주인들은 승자의 고민에 직면했다. 압도적으로 많은 한인들의 바다에 빠진 것이다. 압도적 다수의 한인들을 지배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들이 동원되었다.

첫째, 명나라가 성리학을 기반으로 만들어 놓은 천하 질서를 차용했다. 혼란을 수습하고 숭정제 대신 순치제(홍타이지의 아들)가 하늘의 뜻을 받아 천자가 되는 모양새를 갖춘 것이다.

둘째, 변발과 만주 의복을 강요하는 등 철저한 복종을 요구했다. 오늘날 다른 인류 문화 집단을 외모만으로 차별하거나 위협하는 것은 제노사이드(집단 살해)적 행위에 해당된다. 만일 현대의 법을 소급한다면 당시 소수의 만주인들은 다수의 한인들에 대해 일종의 제노사이드를 범했던 셈이다. 1645년 4월 양주에서는 불과 10일 만에 80만명의 한인들이 학살당하기도 했다.

셋째, 십종십부종(十從十不從)책을 채택했다. 한인 엘리트 김지준(金之俊·1593~1670)은 섭정왕 도르곤에게 “한인 성인은 만주 풍습을 따르되, 어린아이는 따르지 않는다(老從少不從)” “노역이나 세금은 바치되, 문자나 언어는 따르지 않는다(役稅從文字言語不從)” 는 등의 10가지 만한공존책을 헌의했다.

김지준은 나중에 일제에 부역했던 한간(漢奸)보다 더한 대한간(大漢奸)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 덕분에 한인들은 제노사이드적인 민족 말살을 모면할 수 있었다. 현대에 와서는 거꾸로 만주 소수민족이 “중화(中華)민족”이라는 관념 속에서 공존하고 있다.

남명(南明), 삼번, 그리고 대만의 복속

북경이 만주인들에게 점령당하자 한인들은 장강(양쯔강)을 넘어 명나라의 원래 수도였던 남경에서 만력제의 손자이자 숭정제의 사촌형인 홍광제(弘光帝)를 중심으로 명나라를 계승했다. 만일 남명이 오래 버텼다면 북청 만주, 남명 한인, 준가르, 할하 몽골, 타오시 몽골, 일본 그리고 조선 등으로 구성된 국제 관계가 형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만주인들은 강남 지역에 익숙했던 한인 장수들을 앞세워 공격했고, 방어하던 한인들은 또다시 분열했다. 버마(미얀마)로 도주한 홍광제의 동생 영력제(永曆帝)는 1662년 한인 장수 오삼계가 추격하여 목숨을 끊었다.

남명이 무너진 후 삼번에 대한 강희제(康熙帝·1654~1722)의 토사구팽이 시작되었다. 운남성과 귀주성의 오삼계, 광동성과 광서성의 상가희, 복건성의 경중명은 만주인들과 협력해서 이자성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각각의 번(藩)에서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번을 철폐했고, 삼번은 강희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강희제가 삼번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또다시 많은 한인들이 학살당했다. 1683년(강희 22년)에는 대만과 인근 연안 지역에 동녕 왕국을 건설하여 명나라 연호 영력(永曆)을 계승했던 정성공의 후손들이 항복했다.

반청복명(反清復明)의 최후 거점이었던 대만을 복속시킴으로써 만·한 대전이 비로소 일단락되었다. 만주인들은 남명, 삼번, 대만을 모두 삼켰지만 만·한의 운명은 19세기 이후 멸만흥한(滅滿興漢)을 외친 한인들에 의해 역전된다.

그래픽=양진경

꺾이는 효종의 반청 북벌 정책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효종은 만주인들에게 당한 치욕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북벌 정책을 추진했었다. 이완(李浣)을 훈련대장에 임명하고, 네덜란드 출신 난민 하멜을 훈련도감에 배치했다. 효종의 북벌 정책은 실현 가능성 없이 단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남명 세력이 잔존해 있었고, 조선과의 연대 가능성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효종의 북벌 정책이 전혀 허황된 것은 아니었다. 1655년 효종은 “명나라 영력제(永曆帝)는 남경(南京)에 있다. 청나라 군사가 여러 번 사천(四川)을 범하였다가는 패하였다”는 보고를 받기도 했다. 문제는 북벌의 동맹이 될 수 있었던 남명마저 무너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효종의 북벌 정책이 꺾인 또 하나의 이유는 만주인들과 조선인들에게 새로운 공동의 적이 출현한 데 있었다. 만주인들에게 설욕하기 위해 준비했던 효종의 군대는 만주인들의 요구에 따라 새로운 적, 즉 러시아를 막기 위해 투입되었다(나선 정벌).

1644년 북경에서 만난 소현세자와 아담 샬

1644년 만주인들이 북경을 점령했을 때, 그곳에는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 1591~1666)이 있었다. 그는 서양의 천문학적 지식을 동원하여 일식(日蝕)을 정확히 예측했다. 일식 일자를 예측하는 것은 ‘하늘의 아들’(天子)을 자처하던 황제의 권위와 관련된 일이었다. 만주인들은 바로 다음 해인 1645년부터 아담 샬의 역법에 기초한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했다.

독일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천문도구를 든 채 서있다. 보헤미아 출신 동판화가 벤첼 홀라(Wenzel Hollar, 1607~1677) 작품. /위키피디아

아담 샬의 천문 지식에 경탄했던 만주인들 옆에는 병자호란 이후 심양(瀋陽)에 인질로 잡혀갔다가 동갑내기 섭정왕 도르곤과 함께 만리장성을 넘었던 소현세자(1612~1645)도 있었다. 독일에서 출생한 53세의 선교사와 32세의 조선 왕세자가 만·한 대결의 한복판에서 만난 것이다.

소현세자는 아담 샬과 교류하며 서한을 교환했다. 아담 샬이 기록해놓은 소현세자의 서한문을 통해 가톨릭 신앙에 대한 소현세자의 깊은 마음이 전해진다.

1645년 소현세자는 약 9년간의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 왕국으로 돌아온 지 3개월도 안 되어 의문사를 당했다. 이듬해 세자빈이었던 강씨는 사약을 받았고,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어 그중 둘이 유배지에서 죽었다. 1665년 북경에 남아 있던 아담 샬은 또 다른 이유로 모함을 받고 거열형(車裂刑·목과 사지에 밧줄을 묶어 각각 다른 방향으로 잡아당기는 처벌)을 선고받았으나 집행이 미루어지면서 간신히 자연사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