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에 위치한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의 도자기 방. 이 방은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1세의 왕비 소피 샤를로테가 중국의 도자기를 수집해 장식한 곳이다. 17세기 유럽은 토기나 도기는 자체 제작이 가능했으나 자기는 생산할 수 없었다. 1602년 유대 무역상들이 주도해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도자기 붐이 일자 유럽 각국은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렸고, 유럽의 왕이나 영주들이 이를 사들였다. /플리커

17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은 동양에 비해 과학이 뒤떨어져 있었다. 유럽은 자기 제조에 필요한 섭씨 1400도까지 불의 온도를 끌어올릴 수 없었다. 유럽은 700~800도에서 구워지는 토기(clay ware)와 800~1000도의 도기(pottery)는 생산했지만 1300~1500도에서 구워지는 자기(porcelain)는 생산하지 못했다. 당시 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조선과 중국뿐이었다.

明이 망한 뒤 유럽~중국 무역 중단

1602년 유대 무역상들이 주도하여 만든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의해 도자기 붐이 일자 유럽 각국은 도자기 수입에 열을 올렸다. 처음에는 중국 광저우 도자기를 수입했다. 비단·중국차와 함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만 해도 매년 300만 개 이상의 중국 도자기를 수입했다. 그러다 1644년 명나라가 망하고 중국과 유럽 간의 해상무역이 중단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의 도자기를 수입하려 1669년 ‘코레아(Corea)호’까지 건조했다. 그러나 일본의 반대로 조선과의 무역은 무산되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일본 도자기를 주문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시험 주문 6만5000개를 일본이 소화하는 데 무려 2년이나 걸렸다. 하지만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1688년에 발굴한 아리타(이마리) 자기는 전 유럽을 매료시켰다. 그도 그럴 것이, 아리타 자기는 임진왜란 때 붙잡혀간 조선 도공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처음으로 발견한 고령토로 만든 조선 청화백자의 재현이었다. 색을 입힌 채색 자기도 등장했다. 이후 19세기까지 유럽에 팔린 일본 아리타 도자기는 무려 2000만점에 달했다. 이로써 일본이 무역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이고 국부를 늘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등장했던 코레아호에 대해 알아보자.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조선과 교역을 준비하다

일본의 막부 정권은 1609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문호를 개방했다. 조선과 일본이 임진왜란 이후 단절되었던 외교 관계를 회복한 기유약조도 같은 해에 체결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도 무역을 추진했다. 당시 일본 나가사키현 히라도에 설치된 네덜란드 무역관 자크 스펙스(Jacques Specx) 관장은 1610년 11월 본사 최고 의결기관인 17인 위원회에 보낸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 일본 당국에 조선과 직접 교역할 수 있는 재가를 요청했으며… 조선으로 가서 1년에 서너 차례 교역하자고 교섭을 벌였지만, 조선 왕국의 무역금지령과 쓰시마 영주의 반대로 어려운 실정이다. 하지만 비단, 표피, 약제 등이 가져올 이익을 고려해서 계속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당시 네덜란드의 실권자 마우리츠도 일왕에게 보낸 서한에서 조선국과도 거래할 수 있도록 선처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조선과의 교역이 진척이 없자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주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 총독 코엔은 조선에 대한 정보 수집을 히라도 무역관에 지시했다. 당시 쿠커바커르(N. Couckerbacker) 히라도 무역관장의 정보는 꽤 구체적이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 나라는 일본과 거의 동일한 크기로, 큰 원형의 섬으로 작은 섬들 사이에 있고, 그 한 끝이 시나(중국)에 접해 있지만, 약 1마일 정도 폭의 강으로 갈라져 있다. 코레아의 다른 한쪽은 타르타리아(러시아)에 접해 있고, 양국 사이에는 폭 약 2.5마일의 수로가 있다. 동쪽으로 28~30마일 떨어진 곳에 일본이 있다. 코레아에는 금광과 은광이 있지만, 굉장한 양은 아니다. 명주도 산출하지만 자국에서 필요로 하는 것보다 적기 때문에 시나로부터 명주가 수입된다. 이 땅에서 특히 풍부히 얻을 수 있는 것은 쌀, 동, 목면, 면직물, 인삼 뿌리이다. …코레아에서 일본과 거래는 대마도 영주만이 할 수 있고, 누구에게도 허용되지 않으며, 영주도 5척의 큰 배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이상의 배를 보낼 수 없다. 그곳에서 면, 면직물, 인삼 뿌리, 매, 호피를 수입하여, 일본에서 3~4배 가격을 받는다. 따라서 거래에서 상당한 이득이 있기 때문에, 영주는 이 거래에 타인이 참가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들은 바에 의하면, 회사가 조선에서 무역을 행하려고 해도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매우 소심하고, 겁쟁이들로서 특히 외국인을 두려워하고 있다….”

17세기 초에 그려진 바타비아(인도네시아 자카르타 북부) 주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총독 얀 피터스존 코엔의 초상화. 코엔은 유대인이다. /위키피디아

이러한 히라도 무역관의 보고에 대해 바타비아 본부는 1638년 6월 상황을 잘 이해했다고 답했으나 본사 생각은 달랐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17인 위원회는 ‘코레아를 발견하라’는 훈령을 내리면서, 일명 ‘보물선 원정대’를 1639년에 파견했다. 조선에 보물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열병과 풍랑으로 실패하고 바타비아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원정은 두 번 더 계속되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조선시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선원들이 두 차례나 우리나라에 왔었다. 다름 아닌 1627년의 박연(벨테브레) 일행과 1653년의 하멜 일행이다. 하멜 일행은 폭풍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 당시 38명 생존자 가운데 22살 난 청년 헨드릭 하멜이 있었다. 하멜을 포함한 8명은 전남 좌수영에 근무하면서 1666년 9월 야음을 틈타 배를 타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조선에 표착한 지 13년 만이었다. 그 뒤 일본에 머물다 1668년 7월 귀국했다. 돌아간 하멜은 자신의 밀린 노임을 청구하기 위해 체류일지와 조선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여 동인도회사에 제출했다. 이것이 ‘난선 제주도 난파기’ 및 부록 ‘조선국기’인데, 우리에게는 ‘하멜 표류기’로 알려져 있다.

회사에 제출된 하멜의 보고서가 소책자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일으켰다. 1668년 네덜란드어로 처음 출판된 이후 불어판, 독어판, 영어판이 경쟁적으로 출간됐다. ‘하멜 표류기’는 조선을 서구에 본격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어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도 조선과의 직교역을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일본, 조선과 네덜란드의 무역을 반대하다

당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무역을 적극 추진했다. 1668년 네덜란드 식민지 문서 제255호에는 이때 동인도회사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검토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귀국한 하멜 역시 경영층에 조선 도자기의 우수성을 알리며 교역을 강력히 주장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 무역을 위해 1669년 1000톤급 대형 상선인 ‘코레아’라는 배까지 별도로 만들었다. 코레아호는 1669년 5월 20일에 휄링겐을 출항하여 이듬해 1월 19일에 바타비아에 도착했다. 당시 선원은 31명이었다. 배는 조선을 향해 출항대기하고 있었다.

일본 에도시대에 제작된 아리타 자기의 모습. 아리타 자기는 임진왜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 이삼평의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조선 청화백자를 재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리타 자기를 본떠 1710년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된 자기가 마이센 자기이다. /위키피디아

그러나 일본이 결사반대했다. 만약 네덜란드가 조선과 통상하면 일본 내 네덜란드 무역관을 폐쇄하겠다는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일본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로부터 수입한 옥양목(무명)과 후추 등을 조선에 되팔아 수십~수백 배의 폭리를 취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에 대한 독점적 무역업자로서의 지위가 흔들릴까봐 극구 반대한 요인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무역관 식스(D. Six) 관장은 “조선은 빈곤하며 서양인을 환영하지 않는 데다, 일본과 중국도 반대하니 일본과 교역을 유지하는 현 상황이 최선”이라는 요지의 보고서를 보내 본부도 이를 최종 수용했다. 결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의욕적으로 명명했던 코레아호는 조선으로 단 한 번도 항해하지 못하는 운명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조선 청화백자의 흐름을 임란 때 잡혀간 조선 도공 이삼평의 후예들이 아리타에서 이어받았다. 그리고 아리타 자기를 본떠 1710년 유럽에서 최초로 개발된 자기가 마이센 자기이다. 마이센 초기 제품들 문양에 조선 청화백자의 모습이 보인다. 유럽 자기의 뿌리는 조선 청화백자인 셈이다.

[본 차이나]

철제그릇 쓰던 유럽 귀족, 도자기 신비로움에 감탄… 집 한채 고가에도 구입

1602년에 설립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이듬해 중국에서 상품을 가득 싣고 돌아가던 포르투갈 상선 캐슬리나 호를 빼앗아 이 상선에 실려 있던 수십 만점의 중국 도자기를 암스테르담으로 가져가 경매에 부쳤다. 당시만 해도 교역과 약탈이 혼재하던 시절이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유대인들이 놀란 것은 경매에 많은 왕들과 귀족들이 몰려든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아름다운 식기를 구입했고 영국 국왕은 도자기를 구매했다. 그 많던 물건이 며칠 만에 그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비싼 가격에 모두 팔렸다.

그 무렵 철제 식기를 쓰고 있었던 유럽 귀족들은 중국제 자기 식기를 보는 순간 그 신비로움에 감탄했다. 무엇보다 식사의 품위가 달라졌다. 이후 유럽 귀족들 사이에 도자기 열풍이 불었다. 특히 왕이나 영주들은 도자기를 수집하는 데 적극적이다 못해 광적이었다. 당시 고급 도자기는 집 한 채 가격이었다. 지금도 유럽 왕궁에 가보면 방 하나를 아예 중국 도자기로 지은 곳이 많다. 중국 도자기가 워낙 고급이어서 유럽에서는 중국 도자기를 아예 ‘차이나(China)’라고 불렀다. 그래서 지금도 동물의 뼛가루를 섞어 만든 도자기를 ‘본차이나(Bone China)’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