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에서 독립국의 수는 꾸준히 증가해 왔다. 제국들은 분열했고, 국제사회는 확대되었다. 국제연합(UN)에 가입한 독립국들은 193개에 달한다. 현재 유라시아의 많은 독립국들도 과거 몽골제국의 권역 안에 있었다. 알렉산더제국에 비해 4배 이상 넓었던 몽골제국은 대영제국보다는 작았지만 소련제국보다 넓었다.

칭기즈 칸이 되는 테무진(1162~1227)은 초원의 위협 세력을 선제적으로 제압했다. 몽골 기병들은 질주하며 지리적·정치적 요충지들을 장악했다. 연속되는 정복전쟁은 지옥과 같았다. 1240년 몽골군은 키예프 루스를 정복했다. 이후 약 240년의 역사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게 공동의 트라우마를 남겼다. 몽골 기병이 넘지 못했던 헝가리와 폴란드는 유럽의 방벽이 되었다. 지금 우크라이나는 이 방벽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한다.

1258년에는 이슬람문명권의 허브 도시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그러나 이슬람문명권을 석권하지는 못했다. 몽골군의 기세는 1260년 예루살렘 북쪽의 아인 잘루트(Ain Jalut) 전투에서 꺾였다. 몽골군보다 강했던 것은 십자군전쟁을 통해 성장한 맘루크 술탄의 노예병사들이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으로는 1234년 만주의 금(金)나라를 정복했고, 1279년 양자강 남쪽의 남송(南宋)을 점령했다. 그러나 대월(베트남) 정복에는 실패했다. 몽골군에 승리한 쩐꾸옥뚜언(陳國峻)은 을지문덕(乙支文德) 같은 영웅으로 베트남에서 기억된다.

두 차례 일본 원정도 실패했다. 1274년 여·몽연합군의 1차 원정에서 싸웠던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埼季長)는 자신의 충성과 공훈을 가마쿠라 막부에게 그림으로 보고했다. 일본에 바다는 침공을 막아준 거대한 해자(垓字)였다. 그 해자 속으로 여·몽연합군을 수장시킨 태풍을 일본에서는 ‘신풍(神風·가미카제)’이라고 불렀다. 여·몽연합군이 다시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 몽골과 고려를 뜻하는 ‘무쿠리 코쿠리(むくりこくり)’라는 귀신 인형을 만들기도 했다.

13세기 세계 최강이었던 몽골 기병 몽골 울란바토르의 몽골국립박물관에 있는 몽골제국 전사 벽화. 13세기 몽골제국은 몽골 기병을 앞세워 정복 전쟁을 벌여 유라시아 지역을 장악했다. 몽골제국은 알렉산더제국에 비해 4배 이상 넓었다. 몽골은 1231년 고려를 침공했지만 고려는 몽골군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며 28년 동안 항전했다. 1259년 고려 고종은 항복했지만 삼별초는 제주도에서 끝까지 몽골에 맞섰다. /플리커

몽골제국의 멍에와 팍스 몽골리카

몽골제국은 공간을 정복하고, 인간들에게 멍에를 씌웠다. 러시아 시인 푸슈킨은 유럽문명에 남긴 아랍문명의 영향에 빗대어 몽골인들을 “대수학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전해 주지도 못한 아랍인”이라고 혹평했다.

몽골 지배 시대는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라고도 불린다. 거대한 제국 안에서 동양과 서양의 외교사절, 여행자(마르코 폴로, 랍반 바 사우마), 상인, 선교사들이 오고 가며 문명 교류가 촉진되었다. 아랍인, 페르시아인, 투르크인 등 색목인(色目人)들은 몽골인 다음으로 우대되었다. 상인들에게는 한 명의 황제가 여러 명의 군주들보다 상대하기 용이했다.

몽골제국은 피정복민의 종교들을 인정했다. 티베트불교는 몽골제국에서 오히려 번성했다. 몽골 황족들의 보시(布施· Amisa-dana)는 몽골군이 장악한 실크로드를 통해 티베트로 수송되었다.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조건으로 기독교 정교도 보호받았다.

약 240년간의 몽골 지배기에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정교를 통해 정체성을 유지했다. 황제에 의해 신변을 보호받은 정교 사제들은 미지의 땅에 수도원을 세웠다. 수도원 주변이 도시가 되면 다시 새로운 땅으로 떠났다. 훗날 시베리아를 개척한 모피 수집상들이나 유배자들보다 먼저 정교 수도사들이 동진을 시작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1620년 북미에 상륙하여 서진을 시작한 것보다 먼저 시작된 선교의 역사였다.

1279년 몽골제국의 권역 및 현재의 몽골과 그 관련 지역

몽골제국에게 멸망당하지 않은 고려

1231년(고종 18년) 몽골은 고려를 침공했다. 막강한 몽골군에 맞서 고려의 무신정권은 국왕과 함께 강화도로 천도하며 항전했다. 이후 압박과 협상, 결렬과 항쟁이 28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강화도 항전이 이루어지는 동안 고려 국민과 국토는 몽골군에게 유린당했다. 홍복원 같은 투몽인(投蒙人)들도 속출했다. 유라시아의 다른 지역에서 승전한 몽골군까지 합세하면 고려의 운명은 시간문제였다.

1259년 고종은 굴욕적 평화를 선택했다. 삼별초는 진도를 거쳐 탐라(제주도)에서 계속 항전했다. 몽골군과 김방경의 고려 관군은 김통정이 이끌던 삼별초군을 항파두리에서 진압했다. 삼별초를 진압한 김방경에게는 충렬왕과 같은 충렬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삼별초를 위해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로 된 ‘항몽순의비(抗蒙殉義碑)’가 항파두리에 세워졌다. 국왕의 군대와 싸웠기에 순국은 아니었지만 그 정신은 소중했다.

고종의 항복 이후 기대했던 평화는 오지 않았다. 몽골은 고려에 정동행성(征東行省)을 세우고 일본 정복에 나섰다. 몽골의 유라시아제국은 피정복민을 강제동원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일본 원정에도 조이(趙彛)와 같은 투몽인(投蒙人)들의 협조가 있었다.

고려 국왕들은 몽골제국 황제의 부마(사위)가 되었다. 몽골황제에게 충성한다는 의미로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의 칭호를 썼다. 탐라에는 몽골군의 군마를 공급하는 말 목장이 만들어졌다. 정동행성은 일본 정복에 실패한 이후에도 존속하면서 고려 내정에 간섭했다. 공물과 더불어 공녀(貢女)들이 제국으로 보내졌다. 이른바 팍스 몽골리카의 이면이었다.

군사적 정복 이후에는 라마불교같은 소프트 파워가 필요했다. 고려가 받아들인 라마불교의 흔적은 개성 경천사의 10층 석탑 등으로 남았다. 고려에 몽골풍이 유행할 때, 보각국사 일연(一然, 1206~1289)은 ‘삼국유사’를 편찬해 단군(檀君)에 관해 기록했다. 제국의 지배에 맞서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정교처럼 정신적 응집력이 필요했다.

몽골 독립의 지정학

1368년 명의 건국과 함께 몽골제국이 사라진 것처럼 오해되곤 한다. 실제로는 1388년까지 북원(北元)과 남명(南明)이 양립했다. 마지막 몽골제국이라고 불리는 준가르는 1644년 명이 멸망한 이후까지 존속했다. 준가르는 만주족이 세운 대청제국에 맞서다가 1758년에 가서야 멸망했다.

1911년 만주족의 대청제국에 맞서 한족 주도의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몽골인들도 독립을 선언했다. 몽골은 북양정부군, 러시아 백군, 러시아 적군 등의 각축장이 되다가 1921년 다시 독립했다. 1924년 복드 칸이 죽고 세계 두 번째 공산국가가 되었다. 중국공산당도 몽골을 비롯한 모든 소수민족의 완전한 민족자결권을 인정했었다. 1939년에는 소련군과 함께 할힌골(노몬한)에서 일제 군대를 막아냈다. 이후 소련의 영향 속에 전통 몽골문자는 키릴문자로 바뀌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외몽골(북몽골)의 현상 유지에 합의했다. 이후 장제스와의 협상에서 스탈린은 만주 문제에서는 양보했지만 북몽골은 양보하지 않았다. 소련의 도움으로 독립한 북몽골은 6·25전쟁 시기 군마(軍馬) 등을 공산군에 지원했다.

냉전 종식 이후 북몽골은 국호를 몽골인민공화국에서 몽골(Mongolia)로 바꾸고, 보다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2013년 몽골의 엘벡도르지 대통령은 김일성대학에서 “폭정은 영원할 수 없다”고 연설했다.

현재 인구 약 300만 명의 몽골은 자타가 공인하는 몽골제국의 후계국이다. 인접한 부랴트자치공화국, 남몽골(내몽골자치구) 등도 몽골제국의 역사와 무관하지는 않다. 북몽골이 독립하지 못했다면 유라시아 몽골제국의 역사는 러시아나 중화인민공화국으로 송두리째 흡수되었을 것이다. 만주족이 세웠던 대청제국의 역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