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1935년 1월 28일 자에 제1회 향토 노래 현상 모집 광고가 실렸다. 경성, 평양, 개성, 부산, 대구, 목포, 군산, 원산, 함흥, 청진의 조선 10대 도시 찬가를 모집한다는 이 광고는 ‘자기를 찾고 흙을 가까이하는 향토애의 배양’을 위해 오케 음반회사가 기획해서 실은 것이다.

목포의 노래에서 민족을 대표하는 노래로 부상한 ‘목포의 눈물’(문일석 작사, 손목인 작곡)은 이 현상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다. ‘향토 찬가’라는 취지에 걸맞게 목포 관련 지명들을 활용한 노랫말 때문에 음반에는 ‘지방 신민요’라 명시돼 있다. 하지만 음악적으로는 단조 2박자에 4음과 7음이 배제된 전형적인 초기 트로트의 양식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외래 음악으로 시작한 트로트가 1930년대 중반에 우리나라 대중음악 장르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목포의 눈물’이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결과 가수 이난영은 스타로 부상했다. 신민요는 물론이고 ‘항구의 붉은 소매’나 ‘바다의 꿈’과 같은 재즈송을 능숙하게 불렀던 그이지만 ‘목포의 눈물’ 덕분에 이난영 하면 자연스럽게 애수의 트로트를 떠올리곤 한다. 대중음악 초창기의 걸그룹 ‘저고리시스터’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그는 1940년에 이미 ‘조선 유행가계의 큰 언니’로 불렸다. 1941년 오케 음반회사에서 표창장을 수여하고 기념 공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광복 후 이난영은 남편 김해송과 K.P.K 악단을 이끌면서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로미오와 줄리엣’의 로미오 역을 할 정도로 무대에 열성적이었다. 6·25전쟁 때 김해송이 납북되자 그는 ‘이난영 악단’을 이끌며 가장의 의무를 다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이난영의 모습 중 하나는 연출가이자 기획자이다. 김시스터즈의 미국 진출에 그의 활약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누군가는 이난영을 ‘불행한 여자’로 기억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할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전성기 시절 그의 활약과 업적이다. 4월에 들려오는 부고가 슬픈 것은 만발한 꽃들과 대비되어서 일지도 모른다. 4월 11일은 이난영이, 4월 13일은 현인이 사망한 날이다. 지난 4일에는 현미가 유명을 달리했다. 고인이 된 옛 스타들을 추모하며 별처럼 반짝였던 그들의 전성기를 떠올린다. 지상의 별에서 천상의 별이 된 그들이 대중에게 바라는 것도 그것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