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사정은 당사자보다 옆 사람이 훨씬 더 잘 헤아린다(當局者迷, 傍觀者淸)”는 중국 속언이 있다. 싸움에 직접 빠져 있는 사람에 비해 곁 사람이 더 크고 넓게 이해(利害)와 득실(得失)을 따질 수 있다는 뜻이다.

중국에는 이런 ‘방관(傍觀)’의 시선이 발달했다. 대표적인 성어가 ‘강 건너 불 바라보기’의 격안관화(隔岸觀火)다. 앞서 소개했듯 이 말에는 관망과 계산의 눈길이 깊이 숨어 있다. 불길이 잦아든 뒤의 상황에 먼저 주목한다.

불을 그저 구경거리로만 여기는 우리와 퍽 다르다. 제 이해득실을 따지면서 다음 행위를 꼭 염두에 두는 습성이다. “산에 앉아 호랑이 두 마리의 싸움을 조용히 지켜보다”라는 말도 그렇다. 좌산관호투(坐山觀虎鬪)다.

/일러스트=김성규

사나운 호랑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이긴다. 싸움에 진 호랑이는 죽거나 크게 다친다. 이긴 호랑이 또한 심각한 부상을 입는다. 산 위에서 이 두 마리의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은 결국 두 호랑이를 잡을 수 있다는 속셈이다.

도요새와 조개의 싸움도 유명하다. 조개를 탐내던 도요새는 부리가 그 다문 입에 갇힌다. 실랑이를 벌이다 힘이 빠진 둘은 이를 지켜보던 사람에게 잡힌다. 어부지리(漁夫之利)라고 하는 유명 성어 스토리다.

이런 언어 흐름에서 알 수 있듯 중국인은 ‘방관’에 퍽 강하다. 온갖 형태의 전쟁과 싸움에 시달렸던 인문적 환경 때문이다. 다툼의 안팎에서 상황을 예의 주시하다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려는 병가(兵家)의 모략(謀略) 사고다.

요즘 수수방관(袖手傍觀)을 멈춘 중국이 행동에 나섰다. 중동-이란의 갈등에 개입해 미국의 입지를 좁히더니, 이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중재할 모양새다. 역시 미국 압박용이다. 견고한 실리(實利) 추구는 늘 돋보이나, 정의(正義)에는 항상 무감해 문제다. 그래서 중국은 우리에게 곧잘 ‘영악한 이웃’으로만 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