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도 유람 중에 전남 강진군(康津郡)을 가보니까 ‘상인의 도시’라는 특징이 눈에 들어왔다. 강진만이라고 하는 천혜의 만(灣)이 있어서 고대부터 해상 물류의 거점이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선박들의 중간 지점이었다. 제주도를 오고 가는 화물도 강진이 중심이었다. 배들이 울돌목을 거치지 않고 편안하게 제주를 갈 수 있다고 해서 이름도 편안할 ‘강(康)’이 붙었다.

강진 읍내를 감아 도는 탐진강(耽津江)도 탐라(耽羅)의 ‘탐(耽)’자를 썼다. 해상왕 장보고의 청해진도 지금은 ‘완도군’라고 하는 별도의 행정구역이지만 과거에는 강진만의 입구에 속한 무역 전초기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강진읍을 내려다 보는 우두봉(牛頭峰)이 하나의 거대한 소대가리 형상을 하고 있다. 소의 오른쪽 귀 옆에다가 일부러 절(高聲寺)을 짓고 종을 치게 해서 소로 하여금 방울 소리를 듣게 하였다.

읍내의 동문샘과 서문샘이라는 샘물도 소의 양쪽 눈을 상징한다고 한다. 온통 소머리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이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강진만을 드나들었던 무역선들이 안전하게 항해하고 돈을 많이 벌게 해달라는 의미에서 고사 지내던 소머리 봉우리였던 것이다. 큰 제사를 지낼 때는 돼지머리보다 소머리를 올려 놓는데, 소머리 중에서 가장 큰 사이즈는 강진의 우두봉인 셈이다.

해상 무역의 도시 강진을 육지에서 떠받친 상인은 병영상인(兵營商人)이었다. ‘병영상인 연구’로 학위를 받은 주희춘 박사(강진일보 대표)에 의하면 ‘병영상인들은 강진군수 할래 장사꾼 할래 하면 다들 장사꾼 한다’고 대답한다는 것이다. 병영(兵營)은 강진 읍내에 있었던 조선시대 육군본부였다. 왜구로부터 전라도를 지키고 무역업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선 초기부터 병력을 주둔시켰다. 상주 병력은 대략 500명. 상비군 500명을 떠받치던 주변 병참 인원은 1만1000명가량. 병영성 주변에서 군부대를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하던 가구 수는 약 3000가구였다고 한다.

이들이 병영상인이었다. 참치로 유명한 동원그룹의 김재철 명예회장도 바다와 육지를 누비던 병영상인의 후예이다. 미국 한반도 정책의 브레인 빅터 차의 뿌리도 병영상인이다. 주희춘에 의하면 조부인 차종률이 강진에서 장사를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남양호텔을 운영하였고, 부친 차문영도 경기고, 컬럼비아대 정치학 박사였던 ‘먹물’이었다. 그렇지만 뉴욕 맨해튼에서 골동 도자기 상점을 운영해서 돈을 벌었다. 그 바탕에서 아들 빅터 차가 출세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