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계에 종사해서 그런지 사람들로부터 미술에는 문외한이라는 당당한 고백(?)을 종종 듣는다. 겸양 표현이라 미루어 짐작하지만, 입시 위주 교육을 할수록 문화 예술은 멀리해야 했기에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문화를 즐길 기회가 부족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어려서부터 문화를 자연스럽게 체득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사회적 경제적 안정을 이룬 후 당위적으로 갖추려고 하니 흥미를 갖기도 쉽지 않다. 다행히 요즘은 해외에 나가지 않고도 문화 나들이를 할 곳이 많아졌다. 최근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서울 리움미술관의 마우리치오 카텔란 전시와 부산시립미술관의 무라카미 다카시 전시다. 흥미롭게도 세계적인 두 수퍼스타가 예술가가 된 과정을 살펴보면 문화를 즐기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결국 훌륭한 예술가가 태어나고, 그것이 다시 그 사회의 문화 자산으로 돌아온다는 생각이 든다.

서울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있는 마우리치오 카텔란(왼쪽)이 다람쥐 박제와 세라믹, 나무 등을 활용해서 제작한 작품 ‘비디비도비디부’.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난 그는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하고 노동자로 일했지만, 창의성과 열정이 이탈리아 예술계에서 인정받으면서 세계적인 설치미술가가 됐다. /리움미술관

마우리치오 카텔란과 같은 작가의 탄생이 바로 그 증명이다. 그는 1960년 이탈리아 태생으로 가난한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노동자로 일하던 어느 날 갤러리 창문 너머로 예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았고, 자신도 예술가가 되고 싶다는 열망으로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뿌리고, 예술계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전시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첫 개인전에서 무엇을 보여줘야 할지 걱정한 나머지 갤러리를 닫고 문 앞에 ‘곧 돌아옵니다. (Torno Subito)’라는 임시 명판을 남겨놓았다. 두 번째 전시에서는 만들지도 않은 작품을 도난당했다고 경찰서에 신고하고 접수증을 전시했다. 서류는 작품을 걸지 못해 죄송하다는 해명의 글일까, 그 자체가 작품이 된 것일까?

리움미술관 곳곳을 메우고 있는 비둘기도 비슷한 맥락에서 만든 작품이다. 베네치아 비엔날레 초청 작가가 되어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전시장을 사전 탐방했을 때 아무 전시도 없는 텅 빈 전시장에는 비둘기 떼가 가득했다. 작가는 새로운 작품을 구상해오는 대신 비둘기 박제를 만들어 와 그대로 전시했다. 다른 해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는 기획자가 애써 내준 전시 벽을 광고로 팔아 향수 회사의 광고가 게시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것을 광고로 볼까, 작품으로 볼까? 황당하기도 하지만 유머러스한 통찰에 평론가와 큐레이터들은 박수를 보냈다. 작가와 대화하는 행사에선 이들이 작가인 척 연기하며 대신 나서기도 한다. 그의 예술에는 어디까지가 작품이고 삶인지 구분이 없다.

반면,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전시 중인 1962년 일본 태생 무라카미 다카시는 여러 면에서 카텔란과 대조를 이룬다. 귀엽고 예쁜 그림을 그리는 가벼운 작가인 줄 아는 사람들도 있지만, 미술관 벽에 새겨진 작가의 이력을 살펴보면 학력에 대한 집착이 눈에 띈다. 고등학교 시절 전교생 550명 중 530등, 재수생 시절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새벽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가 심야 택시 기사로 일하는 아버지와 마주치고, 결국 삼수하면서 새벽 5시에 일어나 열심히 공부한 끝에 명문 동경예술대학에 입학, 내친김에 석사와 박사까지 마치고 미국 유학을 통해, 어려운 환경과 사람들의 몰이해를 딛고 세계적 작가로 거듭났다는 내용이다.

‘무라카미 좀비’라는 타이틀이 붙은 개인 회고전을 부산에서 열고 있는 팝아트 작가 무라카미 다카시(왼쪽)가 여성의 신체를 모티브로 삼아 만든 작품. 무라카미는 삼수 끝에 도쿄예술대에 입학할 정도로 끈질긴 학구열을 보였고, 서구와 차별화되는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김동환 기자

박사 논문의 주제이기도 한 ‘수퍼플랫(superflat)’ 이론은 그를 세계적 작가로 평가받게 한 토대다. 서양화가 원근법이나 명암법을 사용하여 깊이 있는 공간을 표현한다면, 일본화는 윤곽선을 강조하고 테두리 안의 공간을 색칠할 때 원근감 없이 평평하게 칠하기 때문에 디자인적 요소가 강조되고 작품 속 공간이 납작해질 수밖에 없다. 무라카미는 바로 이 일본화의 ‘평평함’을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 즉 ‘얄팍함’과 연결하는 통찰력 있는 해석을 제시했다. 이는 서구의 팝아트와는 구분되는 일본의 독자적 현대미술 언어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고, 일본의 전통 회화에 대해서도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작가는 진지한 태도로 세계 곳곳에서 개최된 강연에 나서 영어와 일본어를 섞어가며 자신의 예술관을 설명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우연히 동시에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두 작가의 이력을 보며 각자 자신들이 체득한 이탈리아와 일본의 문화적 자산을 자양분 삼아 창작을 이어 나갔다는 공통점을 본다. 그러나 이들이 작가로 수용되는 과정 만큼은 차이가 있었다. 카텔란은 쉽게 작가가 되었고 무라카미는 노력형이라는 뜻은 아니다. 개인의 문제이기 전에, 그들이 속한 사회의 문화적 토양이 달랐다. 마치 영어권 국가에 태어나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모국어로 구사하는 사람과, 힘들게 노력해서 영어를 잘하게 된 경우처럼 말이다. 물론 모든 이탈리아 사람이 다 세계적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니 카텔란의 영민함과 노력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제도권 교육이 없어도 누구나 문화를 체득하고 예술가를 꿈꿀 수 있는 이탈리아의 문화 자원과 사고의 자유로움이 부러울 뿐이다. 보이는 모든 것이 예술인 이탈리아에 살면서 거리의 비둘기와 노숙자를 예술로 보지 못할 이유는 무엇일까? 일상이 예술과 철학의 대상이 되면 삶의 의미가 깊어지고 흥미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예술적 소양을 갖춘 관객층은 사회의 문화 자산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전공도 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예술가가 될 수 있냐고 의문이 들기보다는 그의 소심한 행위에 예술적 의미를 부여한 관객의 해석이 그를 작가로 만든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시장마다 가득한 인파를 보면 바로 그 점을 체득할 수 있다. 카텔란의 말처럼 오늘날 작가를 만드는 것은 관객일지 모른다. SNS(소셜미디어)에 올리기 위한 사진을 찍으러 간 것이라 하여도, 지금 당장 작품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괜찮다. 전시를 보며 떠오른 의문을 한 번만 더 길게 생각해 보는 것이 문화를 즐기는 방법이다. 그렇게 알게 된 지식과 생각이 쌓이면 스스로 문화를 즐길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