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까지 그려진 17세기 인도양 지도 - 한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와 인도 등이 비교적 뚜렷하게 표시돼있는 인도양과 태평양 지도. 1660년대 서양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며 베트남 황사자료관이 소장하고 있다. 고대와 중세의 대표적 무역 항로였던 해상 실크로드가 실제로는 한반도까지 연결됐을 가능성이 컸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있다. 지도에 나온 아라비아~인도~동남아~한반도를 직·간접으로 연결해주는 무역 루트가 오래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대 한반도 주민들은 외부 세계와 어느 정도 소통하고 있었을까? 최근 진척된 고고학 연구는 우리 선조들이 한반도 내부에서만 주로 활동했으리라는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고 있다. 각지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들은 일찍이 활발한 해상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경상남도 사천시에 있는 늑도(勒島) 유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곳은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까지 번성했던 국제 교역항으로서 고대 동아시아 해양 네트워크의 작동 방식을 잘 보여준다. 늑도 전체에 걸쳐 패총(貝塚), 매장지, 주거지, 공방 등 고대 유적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다양한 외래 유물들이 발견되어 이 섬이 활발한 국제 교역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화폐, 구리거울, 철기, 토기, 구슬 등 중국·낙랑계 유물과 야요이 토기 같은 일본계 유물이 대표적이다. 연구자들은 한반도 남부, 중국·낙랑, 그리고 일본 열도의 교역망들이 늑도에서 중첩되었으리라 해석한다. 또 이 섬에 현지 주민뿐 아니라 외래 주민의 매장 흔적도 발견되었는데, 이는 현지인과 외래인이 어우러져 교역 활동을 수행하였다는 증거다.

경남 사천 늑도는 국제무역 중심지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 한반도 동남부 지방에서 생산된 철이 낙랑 및 왜로 공급되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고고학 발굴 결과 실제로 늑도에서 한반도 남부의 철과 철기를 수출하고 반대로 일본 물품과 쌀을 수입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이 섬에 다른 지역과는 다른 쪽구들 양식의 온돌 시설이 보이는 점도 흥미롭다. 아마도 연해주의 온돌 방식이 해상 루트를 통해 이곳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늑도 유적은 고대 한반도의 원거리 해양 네트워크가 물산과 문화를 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 외에도 여러 유적지 연구를 통해서 고대 한반도가 동아시아 해양 세계와 활발하게 해상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해졌다. 그렇다면 중동 지역부터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거쳐 중국 남부에 이르는 해상 실크로드가 앞서 거론한 한반도의 해양 네트워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없을까?

아시아 해양 세계를 길게 관통하는 해상 실크로드의 존재는 여러 문헌 자료와 고고학적 연구를 통해 잘 알려져 있다. 유럽 쪽 자료로는 ‘홍해주항기(Periplus of the Erythraean Sea)’가 대표적이다. 이 책은 서기 30년경 당시 로마의 속주인 이집트에 거주하는 무명의 그리스 상인이 동료들을 위해 쓴 일종의 무역 안내서다. 저자 자신이 아프리카 동해안, 아라비아, 인도 남단 지역까지 직접 항해하고 교역을 한 경험을 근거로 이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은 서기 1세기경 홍해로부터 인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해역에서 전개되던 해상 교역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한다. 한편, 중국 측 자료인 ‘한서(漢書)’에는 판위(番禹),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동남아시아를 거쳐 남인도에 이르는 해상 교역로가 소개되어 있다. 아마도 중국 상인과 선원들보다는 동남아시아인들이 교역을 중개했을 것으로 보인다. ‘홍해주항기’와 ‘한서’에 나오는 내용을 종합해 보면 중국 남부~동남아시아~인도~아라비아반도~홍해, 그리고 간접적으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초장거리 해상 교통로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고고학 발굴 결과 역시 이상의 문헌 자료 내용과 부합한다.

이 해상 실크로드는 중국 남부까지만 도달했을까? 최근 연구들은 이 원거리 교역로가 앞서 이야기한 한반도의 해상 네트워크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해상 실크로드의 동쪽 종점은 중국 남부 지역이 아니라 한반도와 일본이었다는 점이 고고학 유물을 통해 입증되고 있다.

한반도와 소통했을 가능성이 큰 곳으로는 예컨대 중국의 광동·광서 지역과 베트남 북부 지역이 있다. 이 지역에 존재했던 남월국(南越國)은 파르티아(고대 이란 왕국)산 은기(銀器)가 발굴되는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서쪽의 인도양 세계와 동쪽의 중국 남부 지역을 연결하는 국제무역 전통이 일찍부터 발전했던 곳이다. 그런데 기원전 2세기에 한 제국이 이곳을 정복하고 9군을 설치했다. 그중 특히 교지3군(交趾三郡)으로 통칭하는 세 지역(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 한(漢)과 동남아시아의 해상 교섭의 요충지가 되었다. 한 제국은 이어서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영토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아마도 교지3군을 통해 유입된 동남아시아산 상품들과 구리거울 같은 한나라의 물품들이 한사군 중 특히 낙랑군으로 전해지고, 다시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확산되어 갔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 구체적 경로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인도와 동남아시아 산물들이 한반도 여러 지역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명백하다. 그 사실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 유물이 유리구슬이다.

백제 고분서도 인도·동남아 물품 발견

고대 한반도는 유리구슬의 최대 소비처 중 하나다. 중요한 지역을 예로 들면,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3만7000점, 마한–백제 권역의 오산 수청동 고분군에서 7만여 점, 백제 무령왕과 왕비의 능에서 3만여 점의 유리구슬이 수습되었다. 유리구슬은 화학 조성을 분석하여 생산지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종합하면 인도와 스리랑카의 코피아, 아리카메두, 기리바와, 베트남의 옥에오, 타일랜드의 카오 삼 케오 등지가 주요 생산지이고, 중국 남부의 허푸(合浦) 등 2차 유통 중심지를 거쳐 한반도의 김해와 일본에까지 간 것으로 정리된다. 유리구슬처럼 오랜 기간 잘 보존되는 물품이 많이 수습되지만 아마도 다른 종류의 해외 물산도 많이 유입되었을 것이다.

김해 유리 목걸이와 사천 토기 유물들 - 가야 시대 유적인 김해 양동리 고분군에서 출토돼 보물로 지정된 수정 목걸이(왼쪽)와, 사적으로 지정된 선사 시대 유적지인 사천 늑도에서 발굴된 각종 토기. 이 유물들은 한반도가 고대부터 활발한 문물 교류의 거점이었음을 알려주는 사료로 평가받는다. /문화재청·김해시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또 다른 질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서기 1세기 이후 해상 실크로드가 한반도에까지 닿아 있고, 한반도 주민들이 원거리 교역 체제에 참여해서 많은 물자와 문화가 유입되었다면, 정치와 사회 부문도 큰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혹시 고대에 해상 중개교역을 기반으로 하는 항시국가(港市國家)가 나타나지는 않았을까? 동남아시아에는 중개무역을 주관하는 항구가 발전하고 그 배후에 도시가 성장하는 항시(港市)들이 발전하고, 이런 항시들 여럿이 연합하여 항시국가로 발전하는 양태를 보인다. 참파, 푸난, 랑카수카 같은 국가들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중 특히 푸난(扶南)은 3세기 초에 세력을 크게 확대하여 동남아시아의 해상 패권을 장악했다.

고대 한반도, 해상 교류에 적극적

우리 역사에도 이 비슷한 국가의 성립 가능성을 제시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이들은 특히 김해 지역의 구야국(狗邪國, 후일 금관가야(金官加耶)로 변모한다)을 주목한다. 유리구슬이 다량 출토된 김해 양동리와 대성동의 고분군이 바로 구야국 왕들의 유적지다. 이곳에는 농업보다 해상 교류와 관련된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1세기 전반 9간(九干: 9개 토착 세력 집단의 족장)의 추대를 받아 가락국(구야국)을 세웠다는 수로왕(首露王) 기사가 나온다. 혹시 이러한 지역 연맹체의 수장으로 추대하는 것이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보이는 항시들의 연합, 그리고 그에 이은 항시국가의 성립과 유사한 현상은 아닐까? 만일 그럴 가능성을 고려한다면 구야국에서 금관국(金官國)으로의 전환은 항시에서 항시국가로 발전하는 결정적 과정을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아직 단정할 단계는 아니지만, 고대 국가의 발전 양상과 국가와 사회 성격에 대해 기존 견해와는 다른 해석이 제시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우리 역사의 해양성이 크게 부각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이 늘 한반도에 갇혀 살지만은 않았으며, 멀리 해양 세계를 향한 큰 조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에 유념하자.

[인도서 온 왕비 허황옥]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과 인도 공주 결혼 이야기… 김해의 무역 위상 반영

허황옥이 그려진 우표 - 한국·인도가 우호 증진을 위해 2019년 공동 발행한 허황후 기념우표. /우정사업본부

‘삼국유사’의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의 비인 허황옥(許黃玉), 일명 허황후(許皇后)는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인데 상제(上帝)의 명을 받아 가락국으로 찾아와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다고 한다. 공주는 많은 종자(從者)들을 데리고 김해 남쪽 해안에 이르렀다. 수로왕은 유천간(留天干) 등 많은 신하들을 보내어 맞이하여 왕후로 삼았다 한다. 왕후는 태자 거등공(居登公)을 낳고 서기 188년에 죽었을 때 나이 157세였으며, 구지봉(龜旨峰) 동북쪽 언덕에 장사 지냈다고 한다.

인도의 왕비가 상제의 명에 따라 한반도에 와서 왕비가 되고 157세까지 살았다는 이 이야기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런 실질적 내용 없는 허황된 전설이라고 치부하고 넘어가기보다는 이 이야기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적 실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인도와 중국 남부를 거쳐 한반도 지역까지 해상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고, 김해가 국제 교역 네트워크의 중요 마디(node)로 성장해 가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