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입원이 길어지면서 보호자로서 병원을 방문하는 일이 잦아졌다. 검사실 앞에 있다 보면 CT나 MRI 촬영이 쉴 새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2017년 140만 건이던 MRI 촬영 건수가 2020년 354만 건으로 증가했다는 기사에 기억이 미치자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MRI 장비를 보유하고 있을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에 찾아보자 답은 의외로 빨리 찾을 수 있었다.

2020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MRI 장비 보유 대수는 10만명당 34.2대로 세계 4위인데 독일(3위, 34.5대), 미국(2위, 34.7대)과 비슷한 수준이며 최다 보유국인 일본(57.4대)과 비교하면 아직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었다. 이런 정보를 금방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보건복지부가 지난 2022년 7월 26일 발간한 ‘OECD 보건통계 2022′ 자료 덕분이다. 이 자료는 OECD가 2022년 7월 4일 발표한 ‘OECD Health Statistics 2022′ 가운데 주요지표별 우리나라 및 주요국의 수준 및 현황을 정리한 것이다. 이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주류 소비량은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본인의 건강 상태가 양호하다고 생각하는 비율은 세계 최하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병원 대기실에서 스마트폰으로 이런 자료를 읽다 보면 병원의 풍경이 다르게 보인다.

/일러스트=이철원

이렇듯 국제기구나 주요국의 정책 자료 등을 신속하게 번역 또는 정리하여 제공하는 경우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과거 접근하기 어려웠던 해외의 동향과 정보는 인터넷 보급 이후 실시간으로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히던 언어의 장벽 역시 구글 번역이나 파파고, 디플(Deepl) 등의 번역 프로그램들을 통해 상당 부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아프리카에 대한 중국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한 평가를 하고 싶다면 영미권 싱크 탱크의 보고서에 더해 당사자인 해당 국가의 언어로 발간되는 신문과 자료를 활용할 수 있게 되면서 보다 균형 잡힌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특정 분야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진행되는 토론회나 대담 프로그램 역시 해당 외국어에 익숙하지 못할 경우 그림의 떡이었지만 이제는 음성 인식에 기반한 녹취 기능으로 정리하고 이를 번역하는 방법을 통해 핵심적인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챗GPT와 같은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 역시 큰 도움을 주고 있다. 과거에 이런 일을 하려면 많은 전문 인력과 조직적 차원의 대규모 예산이 뒷받침되어야했지만, 이제는 개인이나 소수의 인력에 의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해졌다.

OECD, IMF와 같은 국제기구, 그리고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의 연구기관 등에서는 예전부터 다양한 내용의 보고서를 쏟아내고 있지만 이에 관한 체계적인 검토와 분석 그리고 번역 등은 최근까지도 체계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들어서 과거에 비해 이러한 정보와 자료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기술적 지원이 용이해지면서 국제기구나 주요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소개도 증가하고 있으며 그 속도 역시 빨라지고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단순한 소개에 그칠 뿐 정책과 의사결정권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드물다는 점은 여전히 아쉽다. 대표적인 경우가 2022년 미국이 제정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관련 사례이다.

이차전지와 전기차에 대해 미국 내 생산을 전제로 보조금을 지급하도록 하는 인플레이션 감축법 제정 이후 우리는 미국의 산업 및 통상 정책 변화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이미 공개된 자료에 의해 충분히 예측될 수 있었다. 2021년 바이든 대통령 취임 직후 제정한 행정명령 14017호 ‘America’s Supply Chains’는 반도체, 대용량 배터리 등에 대해 미 행정부의 관련 부처에 100일 이내에 관련된 내용을 보고하도록 하였다. 이에 따라 2021년 6월 ‘탄력적인 공급망 구축과 미국 제조업의 활력 증진 및 광범위한 성장 촉진’이라는 이름의 보고서가 공개되었다. 이 보고서의 이차전지와 관련한 내용을 살펴보면 이차전지 부문에서의 미국의 취약성을 분석하고 이를 보완하기 위해 이차전지 수요 확대를 위한 교통 및 발전 부문에서의 정책 수립과 집행, 보조금 지급을 통한 미국 내 이차전지 생산 기반 및 투자 확대, 핵심 광물자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공급 책임 강화 등을 담고 있었다. 이후 IRA에 포함된 핵심 내용들이 모두 제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같은 해 7월 한국산업기술진흥원이 ‘미국 공급망 100일 검토 보고서의 주요 내용 및 시사점: 반도체 및 배터리’라는 보고서를,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은 ‘바이든 행정부의 4대 핵심 품목 공급망 검토 결과 및 시사점’을 발간하여 내용 자체는 빠르게 국내에 소개되었다. 하지만 미국의 산업 및 통상 정책의 변화를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2022년 미 의회의 IRA 제정 이후 뒤늦게 본격화되었다. 과거와 같은 해외의 정보 자체에 대해 무지했던 상황에서는 벗어나고 있지만, 그러한 정보와 자료가 가진 의미와 영향력을 올바르게 인식하고 정책 수립 및 의사 결정 과정에 반영하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지만 여전히 국력과 역량에 걸맞은 국제적 시각과 인식은 부족하다. 기술의 진보는 세계를 보다 쉽고 다양하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줌으로서 우리의 약점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해주고 있다. 국제적 현안과 문제를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라는 잣대로 파악하고 수동적으로 대응한다는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 단순한 지식과 자료의 축적을 넘어서, 이를 토대로 국제적인 흐름과 상호 관계에 대한 이해 증진 및 판단이 모든 의사 결정 과정에 포함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