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KAIST와 포스텍에서 의사과학자 양성을 추진하자, 의사 단체들이 반대하며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만큼 의학의 중요성이 커졌기 때문일 텐데, 논란에서 잠시 물러나 처음 서양 의학이 소개되던 시점의 한 인물을 통해 의료의 본질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895년 12월 25일 서울의 일본공사관이 본국에 다급히 보고했다.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미국인이 도착했는데, 그가 바로 서재필이라는 것이다. 갑신정변으로 망명한 지 11년 만이었다. 3일 만에 정변이 실패하자, 아내는 자살했다. 두 살 난 아들은 굶어 죽고, 집안 전체가 멸문당한다. 그의 나이 겨우 20살이었다. 낯선 미국에서 막노동으로 버티며 영어를 익혔다. 이런 열정에 어느 미국인의 도움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그는 서재필이 신학을 전공하길 원했지만, 서재필은 그와 결별하고 의대를 선택했다.

/그래픽=박상훈

1890년 조선 최초의 미국시민권자가 된 그는 1893년 최초의 서양식 의사가 된다. 얼마 전까지 유교 경전을 외던 선비는 이처럼 몇 년 사이에 과학을 배워 미국 의사가 되었다. 1894년 6월 그는 워싱턴 명망가 집안의 딸 뮤리엘과 결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제임스 뷰캐넌 대통령의 4촌으로 철도 우편 국장이자 워싱턴의 거물이던 조지 뷰캐넌 암스트롱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워싱턴포스트에 실릴 만큼 미국에서도 화제였다.

서재필은 크리스마스에 도착했지만, 그날 조선의 달력은 11월 10일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뒤에는 1896년 1월 1일이 된다. 양력이 시행된 것이다. 이처럼 당시 조선은 동학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였고, 입지가 약해진 일본은 불과 두 달 전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혼란 속에 갑신정변 동지였던 박영효, 서광범마저 조선을 떠나는 상황에 미국 시민권자이자 의사 서재필이 돌아온 것이다. 심지어 서재필은 임신 중인 아내 뮤리엘을 데리고 왔다. 남편만 믿고 대륙을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넜다.

1896년 1월 19일, 서재필이 대중 앞에 나타났다. 수백 명이 모인 자리에서 자신이 경험한 민주주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전했고, 사람들은 열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개 강연이었다. 이 자리에서 서재필이 국기에 경례를 유도하자 박수가 터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국기에 대한 의례였다. 매주 일요일 계속된 대중 강연은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으로 중단되었지만, 그의 행보는 거침없었다.

1896년 4월 7일 서재필의 주도로 독립신문이 창간되었다. 최초의 순 한글 신문이다. 독립신문은 태극기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제호에 태극기를 인쇄했다. 그는 한 발 더 나가 독립문을 세우고, 독립협회를 조직한다. 독립문에도 태극기를 새겼고, 행사마다 자전거를 타고 등장했다. 자전거를 탄 최초의 조선인이다. 아울러 의사였던 그는 공중 보건과 위생을 강조했다. 하지만 독립협회가 서구식 입헌군주제를 주장하자, 반대 세력의 견제로 서재필이 물러난다. 1898년 5월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간다. 두 번째 망명이었다.

미국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사업으로 성공했다. 갑신정변과 독립협회의 실패로 두 번이나 인천항을 떠나며 “한인들이 내 뒤를 받쳐 주지 않는 것을 보니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이라며 조국을 잊으려 했다. 하지만 조선 민중이 태극기를 들고 거리에 나선 3·1운동은 충격을 준다. “1919년 일어나는 것을 보니까 한인들이 죽지 않고 산 백성”이라며 감격했다. 서재필은 미국독립선언이 이루어진 필라델피아에 1919년 4월 미주 한인들을 모아 대회를 열었다. 서재필은 사재를 털었고, 다시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결국 그는 1924년 60세에 파산한다. 그런데 62세에 다시 의대에서 연구한다. 심지어 집을 저당 잡혀 64세에 대학원에 진학했다. 조선에 전염병이 많음을 걱정한 그는 세균학, 면역학, 병리학 등을 공부하며 몇 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실었다. 1925년, 미국에서 서재필과 동업하던 유일한 박사가 귀국한다. 그를 배웅하는 자리에서 서재필은 유일한의 성 ‘버들 유(柳)’를 상징하는 버드나무를 새겨 선물했다. 유일한 박사는 이를 상표로 한국에서 의약업을 시작했다. 이 회사가 유한양행이다.

1947년 7월 1일, 서재필이 미군정의 초청으로 한국에 도착했다. 두 번째 귀향이었다. 83세 노령의 그는 어떻게든 분단은 막아보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정치적 논란에 휩싸이자, 1948년 다시 미국으로 떠나야 했다. 세 번째 망명이다. 미국으로 떠나는 그의 심정은 1948년 9월 12일 자 조선일보에 남아 있다. 수십 년 전 망명할 때와 같은 항구에서 또다시 고국을 떠나는 감상을 묻자, “조속히 통일 국가를 만들어 잘살기를 바란다”라고 답했다.

말년의 그에게 한국전쟁은 마지막 타격이었다. 어린 아들과 온 가족이 죽었지만, 미국 주류사회의 여인과 결혼하여 의사로 살아가다 독립운동으로 파산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했던 조국. 전쟁의 충격으로 그는 1951년 1월 8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미국인 동료 의사는 서재필의 마지막을 이렇게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가 사망하자 오히려 나는 안도했다. 그만큼 그가 고통스러워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늘 보건 의료를 강조했다. 신학보다 의대를 택한 것도, 환갑이 넘어 의대에서 연구한 것도 현실 개혁에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수단으로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 많은 지식인이 의료인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일제 강점기 33.7세였던 한국인의 수명은 2020년 기준 83.5세로 두 배 이상 늘었고, 영아 사망률 역시 천 명당 241명에서 2019년 기준 1.45명으로 무려 170분의 1로 줄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의료가 발달한 사례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그 시작은 최초의 의사 서재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