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얼마 전 제주의 구도심에 있는 허름하고 오래된 가옥에 딸린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피워놓고 몇몇 작가와 둘러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컬렉터이자 기업가 출신 화가인 ‘씨킴(김창일)’이 내게 툭 “꿈 냄새가 나지 않아요?” 하며 말을 건넸다. 마주한 작가들은 여러 해 동안 비어있던 공간을 임차해 이리저리 손봐가면서 아트스페이스 ‘빈공간’이라 이름 붙이고 작업장과 전시장으로 쓰고 있었는데 거기서 빵도 직접 구워낸다고 했다. 하지만 정작 씨킴이 내게 던진 말은 분명 ‘빵’ 냄새가 아니라 ‘꿈’ 냄새였다.

# ‘꿈’ 냄새의 진원지는 다름 아닌 그곳 작가들이었다. 30, 40대이니 젊다고만 얘기하기도 뭣한 작가들이다. 그중 ‘빈공간’의 주인장 격인 이상홍 작가의 드로잉 작품 중에 파란색 잉크로 그린 ‘발’ 그림이 눈에 띄었다. 작가의 부연 설명을 듣자 하니 자기가 40세가 되고 아버지가 7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와 마주하니 서먹하다 못해 별반 할 말도 없어,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이 아래로만 내려가 발만 보게 되었는데 가만 보니 발이 닮았더라는 것이다. 그것을 모티브 삼아 그린 작품이라 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자기를 향한 아버지의 ‘꿈’ 대부분을 저버리고 살고 있지만 역으로 자신과 닮은 발을 가진,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먼저 겪었을 아버지의 발을 보면서 자신도 모르게 다시 ‘꿈’을 생각하고 되찾게 되었노라고 고백하듯 말했다. 비록 그 ‘꿈’이 아버지가 자신에게 두었을 ‘꿈’과는 사뭇 다른 것일지라도 말이다.

# 흔히 ‘꿈’ 하면 하늘을 쳐다봐야만 할 것 같지만 역설적인 얘기로 ‘꿈’은 하늘을 쳐다본다고 생기거나 품어지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 작가의 드로잉에 담긴 사연처럼 되레 발을 보고 땅을 보고 아래를 볼 때 더 근본적이고 뿌리에 잇닿는 자기 본유의 ‘꿈’을 발견하고 발굴할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경우, 당면한 현실의 삶 속에서는 하늘을 쳐다보나, 땅을 굽어보나 매한가지로 꿈은커녕 한숨만 나오기 일쑤다. 뭐 하나 제대로 될 것 같지 않고, 팍팍한 삶은 코로나 사태 전이나 후나 가릴 것 없이 똑같다. 게다가 더 나아질 기미조차 없이 외려 떨어져라, 떨어져라 하며 등 떠미는 형국이니 이런 느닷없는 ‘꿈’ 얘기 자체가 공허하다 못해 되레 화가 치밀 정도일 것이다. 꿈꿀 건더기가 아예 없는데 뭘 갖고 무슨 꿈을 꾸란 얘기냐고 성난 메아리가 울려올 판이다.

# 최근 골드만삭스가 세계 최저 수준의 출산율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견했다. 2050년에는 저출산과 초고령화로 경제 순위 면에서 올해 세계 12위에서 15위권 밖으로 밀려날 전망이라고 한다. 한때 ‘하나만 낳아 잘 키우자’고 산아 제한을 국가 목표로 정했던 대한민국이 어찌하여 단 한 세대가 바뀌었을 뿐인데 세계에서 가장 출산율이 낮은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인가 곰곰 생각해보면 한마디로 더는 꿈꿀 수 없기 때문에 아이도 낳지 않으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단순하게 초(超)저출산에 따른 생산 인구 감소만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더욱더 심각한 것은 국민과 국가 전체가 ‘꿈’을 상실한 상태로 치달아가는 작금의 폭주하는 현실이리라.

# 국가 지도자의 최고 덕목은 국민에게 꿈꿀 수 있는 터전을 열어주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박정희가 온갖 비난과 비판 속에서도 여전히 대한민국 중흥의 대통령으로 각인될 수 있는 까닭은 그가 기아 선상에 머물던 국민들에게 밥과 빵을 통해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게 해주고 경제성장을 일궈낸 데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다 함께 잘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정신도 일깨웠지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국민으로서 “새 역사를 창조하자”는 국가적 ‘꿈’, 곧 비전을 제시한 시대의 위인이었다는 점이리라. 비록 그것이 일본 메이지유신의 교육 칙어를 본뜬 것이라 하여 비판과 비난을 적잖이 받기도 했지만 54년 전인 1968년 12월 5일 천명한 국민교육헌장을 통해 국민이 할 바와 국가의 꿈과 비전을 분명하게 적시한 것은 결코 욕먹을 일이 아니라 길이길이 기억하고 되새겨 선양해야 할 일이었다. 박종홍과 안호상이 기초했다는 국민교육헌장은 지금 다시 읽어봐도 뭐 하나 더하고 뺄 것조차 없는 명문이다. 글이 미려하다기보다 거기 국민과 국가가 한 몸이 되어 나아가야 할 방향과 꿈이 담겼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세기가 지나 지금은 사라지고 잊힌 그 헌장에서조차 작금의 대한민국과 국민이 상실한 꿈의 흔적을 재발굴해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 세종의 꿈, 이순신의 꿈, 안중근의 꿈, 박정희의 꿈… 어쩌면 이런 꿈이 이 나라를 여태 지탱해오고 급기야는 세계가 놀라는 기적의 부흥을 가능케 한 기저(基底)의 힘이리라. 백성을 불쌍히 여겨 한글을 만든 임금. 그의 꿈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문화 강국 대한민국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리라. “신에게는 배 12척이 남아 있습니다”라며 절체절명의 악조건 속에서도 최후 승리의 꿈을 놓지 않았던 충무공이 있었기에 조선은 살아남을 수 있었고, 오늘의 대한민국 역시 그 꿈의 뿌리에서 다시 건재할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면서도 동양 평화를 꿈꾼 안중근의 꿈이 있었기에 망국의 설움을 딛고 대한민국이 다시 일어서 선진국 반열에 설 수 있게 되었던 것 아니겠는가.

# 검은 호랑이해라고 떠들썩했던 연초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마저 절반을 넘어가며 이제는 진짜 연말이다. 이 연말에 작금의 대한민국은 안타깝게도 전후좌우, 위아래 할 것 없이 모두 꽉꽉 막혀 있는 형국이다. 선진 대한민국이 나아갈 새로운 국가 비전의 제시는커녕 아예 ‘꿈’ 냄새조차 없다. 과거 청산도 필요하다지만 새로운 미래 한국에 대한 구체적인 ‘꿈’의 제시 없이 과거에 칼만 쑤셔댄다고 결코 국민 다수가 손뼉 치지 않는다. 제발 내년 검은 토끼의 해에는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물론 윤석열 정부 역시 대한민국의 새 ‘꿈’을 품고 제시하며 그것을 이루려는 몸부림을 보여달라. 그래야 대한민국이 살고 우리 모두가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