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상 선수 속출했던 19세기 사립학교의 축구 - 영국 런던 북서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명문 사립학교 해로스쿨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축구 경기를 하는 모습을 화폭에 담은 화가 토머스 헨리(1852~1937)의 그림.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의 사립학교들은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믿음으로 격렬한 스포츠의 대명사인 축구를 교육 수단으로 적극 권장했다. 당시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과격하게 경기하다 중상을 입는 일도 속출했다. 이런 운동 스타일은 졸업생들에게는 소중한 전통으로 인식됐다. /위키피디아

오늘날 세계인이 열광하는 축구는 언제 시작됐을까?

축구의 기원이라고 볼 만한 다양한 공놀이는 고대 이래 세계 각지에 존재했으나 현재 월드컵 경기에서 보는 현대식 축구는 19세기 영국에서 완성되었다. 1863년 10월 26일, 런던의 프리메이슨즈 태번(Freemasons’ Tavern)이라는 선술집에 12명의 축구 클럽 대표들이 모여 ‘잉글랜드·웨일스 축구협회(Football Association, 약칭 FA)’를 결성하고 통합 축구 규칙을 작성한 것을 결정적 계기로 친다. 이렇게 합의된 규칙에 따라 운영하는 경기를 ‘협회 축구(Association Football)’라고 불렀는데, 이때 Association이라는 단어의 중간 부분을 따와 사커(soccer)라는 말이 만들어졌다.

이상이 통상 거론하는 현대 축구의 기원에 관한 정설이다. 그런데 당시 작성된 협회 규칙을 보면 이상한 점들이 한둘이 아니다. 손으로 공을 잡는 핸들링이 허용되었고, 골대에 크로스바가 없으며, 터치다운 규칙도 있고, 무엇보다 전진 패스가 아예 허용되지 않았다. 이러면 축구가 아니라 차라리 럭비 경기와 유사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다시 말해 협회 창설은 현대 축구를 완전히 정립시켰다기보다는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계기였을 뿐이다.

귀족들은 공 돌리는걸 비겁하게 생각

축구의 발전에 대해 과거에 자주 거론한 해석은 엘리트층이 주도하는 일종의 ‘문명화 과정(civilizing process)’이라는 견해다. 중세 이래 이어져 온 민속 축구는 규칙도 거의 없는 상태로 많은 사람이 골목길이나 벌판에서 거칠게 부딪치는 난장판의 놀이였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 상스러운 하인을 욕할 때 ‘축구나 하는 천한 놈’이라고 비난하는 식이다. 그런데 산업혁명 시기에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이런 식의 거친 놀이는 사라져가고, 대신 이튼, 해로, 윈체스터 같은 명문 사립학교(Public Schools라고 부르지만 실제 사립)에서 규칙을 지키며 정정당당하게 승부를 겨루는 경기로 발전했다. 각각의 학교는 자신들만의 고유한 경기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립학교 졸업생들이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만나 함께 축구를 하고자 했을 때 출신 학교와 상관없이 모두 따를 수 있는 공동의 규칙이 필요했다. 그 결과가 1863년 가을 축구협회 결성과 협회 규칙의 제정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엘리트층에 의해 깨끗하게 정돈된 형태의 축구가 정립된 다음 노동계급에 전해졌고, 이후 대중 스포츠로 발전했다는 것이 이런 해석이 말하는 바이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축구공 - 에게해에 있는 그리스령 사모트라케섬에서 발굴된 기원전 3세기 축구공의 축소판 모형. 현재 축구공과 매우 비슷하다. /FIFA 박물관

그러나 최근 연구는 사뭇 다른 설명을 제공한다. 노동계급은 엘리트층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단순히 받아들인 게 아니라 훨씬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다.

우선 중세 이래의 민속 축구에 대한 견해부터 수정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시골 벌판이나 골목길에서 많은 사람이 무질서하게 이리저리 뛰는 ‘동네축구’를 했으리라는 것은 지레짐작에 불과하며, 실제로는 훨씬 정제된 경기를 하고 있었다. 예컨대 ‘정육점 팀’과 ‘장갑 제조업 팀’ 간의 경기를 언급한 19세기 기록에 따르면 팀당 7명의 선수들이 명확하게 규정된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다. 심지어 18세기에 한 팀 6명씩 뛰는 여성 축구 경기 기록도 있다. 수십 명이 무질서하게 날뛰며 격투를 벌였으리라는 것은 오해의 산물이다.

오히려 19세기 명문 사립학교의 축구야말로 그런 격렬한 몸싸움의 대명사였다. 원래 사립학교 교장들은 축구가 ‘백정들에게나 어울리지 신사들에게는 안 맞는 놀이’라고 생각했으나, 1840년대 무렵부터 건강한 정신은 건강한 몸에서 길러진다는 ‘근육질 기독교’ 정신이 강조됨에 따라 축구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청년들이 방탕한 성욕, 특히 동성애 같은 ‘비정상적’ 욕망에 휩쓸리지 않도록 만드는 데에는 과격한 운동이 최고라고 보았다. 그 결과 학교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이 축구를 하다가 땅에 처박히고 여러 명에게 깔리고 심하면 다리가 부러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학생 시절 이런 과격한 운동을 한 경험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졸업생들은 대개 자신의 학교 전통을 고수하려 했으며, 여러 학교 규칙들을 취합하여 적당히 만들어낸 잡종 규칙에 저항했다. 따라서 1863년에 제정된 협회 규칙은 거의 채택되지 않아서 사문화될 처지에 몰렸다.

한나라 축국 - 중국 한나라 시기에 유래된 것으로 알려진 축국(蹴鞠) 경기 모습을 그린 풍속화. 돼지나 소의 방광에 공기를 넣어 공으로 삼았다. /위키피디아

그러는 동안 옛날식 축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명문 학교와는 관련 없는 이런 사람들이 오히려 축구 규칙을 당대 사정에 맞게 조정해 갔다. 이들은 자기에게 익숙한 규칙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적절한 타협을 통해 공동의 규칙을 만드는 데 우호적이었다. 그래야만 게임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특히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셰필드 축구 클럽이다(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축구 클럽이다). 1857년 이 클럽이 주도하여 규칙을 수정했는데, 이때 크로스바를 만들고, 코너킥과 프리킥을 도입했으며, 특히 오프사이드 위반 규칙을 완화했다. 당시 사립학교 축구에서는 상대방 진영 깊숙이 들어가 있는 동료에게 전진 패스를 하는 일은 아예 없었고, 오직 힘으로 상대방을 밀치면서 앞으로 전진하는 무력 대결을 펼쳤다. 이와 달리 셰필드 클럽의 규칙은 우리 편 공격수 앞에 상대방 선수가 한 명이라도 있으면 패스를 받는 것을 허용했다. 이런 방식의 경기가 훨씬 큰 인기를 누려서, 한 해에만 200번 가깝게 벌어졌다. 토요일에 오전 근무만 하는 반공일(半空日, half-holiday) 제도가 정착해 갔고, 그 결과 토요일 오후에 셰필드 클럽 규칙을 따르는 축구 경기가 급증했다. 시대의 대세를 무시할 수 없었던 축구협회는 새로운 오프사이드 규칙을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새로운 규칙에 잘 적응한 팀이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스코틀랜드 축구 클럽들이 앞서나갔다. 글래스고의 퀸스파크 클럽은 무모한 드리블 위주의 경기 운영 대신 ‘연합경기(combination play)’, 오늘날 용어로 이야기하면 패싱 게임(passing game)에서 뛰어난 실력을 과시했다. 축구를 일종의 유사 전투로 받아들이던 명문 학교 출신들이 보기에 이런 식으로 공을 살살 돌리는 방식은 ‘남자답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실제 경기 결과가 중요한 법, 패스를 정교하게 하는 스코틀랜드 팀이 남자답게 우격다짐만 하는 잉글랜드 팀보다 늘 좋은 결과를 얻었다. 결국 잉글랜드에서도 스코틀랜드 스타일이 확산했다. 1885년에 프로 축구팀 제도가 시작되었을 때, 블랙번 로버스, 애스턴 빌라 같은 팀들은 패싱 게임에 능한 스코틀랜드 출신 선수들을 영입했다.

피렌체 칼초 - 이탈리아 피렌체 지방의 민속경기 ‘칼초’ 장면을 묘사한 프랑스 삽화가 외젠 담블랑(1865~1945)의 그림. /게티이미지코리아

1883년 FA컵대회서 노동자팀이 우승

1883년 FA컵 대회 결승전이 이런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노동자 팀인 블랙번 올림픽이 이튼 학교 팀을 꺾고 우승했다. 누가 봐도 키가 10㎝가량 더 큰 엘리트 팀이 월등하게 나은 체격을 앞세워 노동자 팀을 쉽게 이길 줄 알았으나, 막상 경기를 해 보니 상대방이 요리조리 패스하는 공을 쫓아다니다 완전히 나가떨어졌고, 결국 2대1로 지고 말았다. 이제 거칠게 힘으로 밀어붙이는 차징 게임(charging game)은 정교한 패싱 게임 앞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다. 셰필드, 맨체스터, 리버풀 같은 산업 도시의 노동계급 팀들이 축구의 면모를 영영 바꾸어 놓은 것이다. 자신들의 방식으로 축구에서 이길 가능성이 사라진 명문 학교 학생들은 럭비로 눈을 돌렸다.

매사에 엘리트층이 주도하여 노동계급을 세련되게 문명화시킨다고 생각하기 십상이지만, 축구 경기에서만큼은 반대로 노동계급이 엘리트층을 문명화시켰다.

[고대 동서양 모두 축구 즐겨]

중국 한나라의 축국, 로마는 하르파스툼, 멕시코에선 울라마

여러 사람이 대형을 갖춰 둥근 공을 차고 달리는 놀이 혹은 제의 행위는 세계 각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록상 가장 오래된 것은 중국 고대 한나라의 축국(蹴鞠)이다. 황제가 군사 훈련 목적으로 돼지나 소의 방광에 공기를 넣어 만든 공을 상대방 골에 집어넣는 경기를 시켰다고 한다. 같은 시기 로마제국에서는 하르파스툼(Harpastum)이라는 경기가 있었는데, 아마도 축구보다는 럭비와 유사한 형태였다. 이 전통이 살아남아 피렌체 지방에서 아직도 거행하는 전통 경기 칼초(calcio)가 되었다. 이 경기에서는 공을 잘 차는 것만큼이나 주먹질과 레슬링 기술이 중요한 요소였다.

아마도 가장 오래된 사례로는 멕시코 지역을 중심으로 아메리카의 광대한 지역에서 거행되었던 울라마(ulama)를 들 수 있다. 고무공을 발로 차거나 엉덩이로 튕겨서 상대방 골문에 넣는 이 경기는 기원전 3500년경부터 종교의식의 일환으로 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