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년간 둘도 없는 친구였던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 관계가 심상치 않다. 사달은 석유 감산 결정에서 났다. 10월 5일 오펙플러스(OPEC+) 회의에서 주요 산유국들은 11월 생산 물량을 하루 200만 배럴씩 줄이기로 했다. 배후에 사우디가 있다는 의심이 퍼졌다. 중간 선거를 앞두고 물가 잡기에 온 힘을 기울이던 바이든 정부는 분노했다. 사우디가 러시아 편을 들었다며 비판했다. 의회도 나섰다. 관계 전면 재검토, 무기 금수 등 외교적으로 수위가 높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갑자기 불거진 마찰은 아니다. 왕실의 언론인 살해 의혹, 예멘 내전 책임 공방, 인권 문제 등을 둘러싸고 바이든 대통령과 빈살만 왕세자 관계는 이미 삐걱거렸다. 7월 중순 대면했을 때는 민망할 정도로 팽팽한 논박을 주고받기도 했다.

그래픽=송윤혜

미국과 사우디는 서로 필요불가결한 나라였다. 1945년의 ‘석유와 안보의 교환’ 약속을 토대로 사우디는 미국에 석유를 주고 왕실을 보호받았다. 아랍을 휩쓸었던 반왕정 군사 정변, 아랍 통일 공화국을 추구하던 아랍민족주의의 열풍, 그리고 급진 이슬람 세력의 위협 등 위기 때마다 미국은 사우디를 보호했다. 미국에 사우디는 긴요했다. 안정적 석유 공급이 없었다면 미국 경제는 물론 냉전이 어떻게 귀결되었을지 모른다. 양국 우호 관계는 한 시대를 지탱했던 질서의 대들보였다.

시대가 바뀌었다. 냉전 해체, 셰일 혁명 그리고 기후 위기가 큰 변수였다. 더 이상 사우디의 석유는 미국에 중요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국은 중동을 떠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역내 부상으로 이어졌다. 최근 왕세자 행보에 친러, 친중 기미가 부쩍 비치고 있다. 석유 판매 대금의 위안화 결제설까지 나오고 있다. 거대한 판의 변화로 느껴질 정도다.

이 구조의 변화가 곧 미국과 사우디의 결별로 이어질까? 일부 전문가들은 파국을 예상한다. 그러나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이익 때문이다. 양국의 상호 이익 구조는 생각보다 조밀하다.

첫째, 안보 이익이다. 사우디 안보의 요체는 미국의 방어 시스템이다. 전체 무기의 73%가 미국산이다. 양국 무기 교역 규모는 전 세계에서 압도적 1위다. 영국산 13%를 감안하면 거의 모든 무기 시스템이 영국과 미국의 상호 운용성과 맞물려 있다. 특히 때때로 공습을 당하는 사우디는 미국의 요격 시스템이 필수적이다. 미군의 지휘 통제 정보망이 흔들리면 위기다. 미국 군수 기업들 역시 사우디 시장을 잃을 경우 피해가 막대하다. 큰손 구매자가 있기에 연구·개발 및 투자의 동력이 생기고 생산 규모가 유지된다. 미국산 무기의 감축은 대체 공급자의 등장을 의미한다. 만에 하나 사우디에 러시아나 중국산 무기가 대규모로 공급될 경우 향후 무기 시장의 판도가 변화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경제 이익이다. 사우디는 중동 내 미국의 최대 교역국이다. 투자도 늘고 있다. 사우디 국부 펀드라 할 수 있는 사우디 공공투자기금(PIF)이 최근 미국 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미국 기업 지배 구조에 사우디의 영향력이 커지는 상태다. 2022년 2분기에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JP모건 등 미국 17개 기업 주식 76억달러(약 10조원) 분량을 매입했다. 사우디는 석유 시대 이후에 대비, 건실한 기업 지분을 확보함으로써 수입 기반을 마련하려 한다. 정치적 환경이 악화되었다고 해서 미국 기업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미국 역시 사우디의 투자가 필요하다. 10월 25~27일 사우디 주최 미래투자구상(FII) 포럼에 월가 투자 은행의 최고 경영진과 유수의 투자 전문가들이 정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거 참석했다. 정치 지도자들이 날 선 정치 공방을 주고받을 때 돈의 흐름은 더욱 빠르고 긴밀해진 셈이다. 정치가 돈을 이길 수 있을까?

셋째, 전략적 이익이다. 사우디는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필요하다. 이란과 가까운 중국과 러시아와의 대(對)이란 견제 공조는 한계가 명확하다. 동시에, 국내 반왕실 세력인 이슬람 급진주의 집단을 추적하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보 자산이 긴요하다. 미국 입장에서는 사우디를 잃을 경우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중동 내 친미 기반 상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란, 사우디, 튀르키예 등 역내 강국 모두와 척을 지면 대테러 역량도 약화된다. 한편, 만에 하나 사우디에 중국과 러시아의 해상 전략 자산이 전개될 경우 아라비아해 및 홍해에서 미국 주도의 자유 항행 체계가 붕괴된다. 인도 태평양 전략도 타격을 받게 된다.

이처럼 양국의 상호 이익은 유효하다. 77년간 유기적으로 결합된 관계를 단기에 분리시키기는 어렵다. 사우디 왕실 및 권력층 유력 인사들의 상당수가 영미권 고등교육기관에서 수학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들은 워싱턴 정가는 물론 뉴욕 월가와 런던 시티 등 금융계에도 광범위한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다. 왕세자에겐 부담이다. 미국과의 마찰이 자칫 왕실 유력 인사들의 반감을 일으켜 권력 기반을 허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갈등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바이든 대통령과 빈살만 왕세자의 개인적 의지가 변수라 할 수 있다. 상원의원과 부통령으로 외교의 경륜을 쌓아온 바이든은 사우디의 드센 예비 군주를 인권과 자유의 가치의 영역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한다. 그래야 함께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왕세자는 미국과의 협력 필요성은 인정하지만 고분고분하게 바이든을 따를 생각이 없다. 중국과 러시아를 끌어들여 바이든에게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일종의 지렛대다. 앞으로 최소한 40년 이상 통치할 지도자로서 자신에 대한 미국의 간섭은 용납하지 않을 기세다. 별다른 간섭 없이 무조건 자신을 지지했던 트럼프를 좋아하는 이유다. 어쩌면 왕세자는 미국과 각을 세우는 것이라기보다 바이든과 선을 긋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양국이 함께 해야 할 명분과 이익은 뚜렷하다. 지도자의 성향과 의지가 변수인 셈이다. 혈기와 자존심 경쟁으로 인해 냉철한 이익 판단이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관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