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데레프스키는 당대를 풍미한 피아니스트면서 조국 폴란드의 독립과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 지도자였다. 3국 분할 점령기였던 191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에서 연설하는 등 국제사회에 조국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왼쪽). 준수한 용모를 가진 그의 연주에 청중들이 열광하는 모습을 담은 그림(가운데)이 등장할 만큼 대중적 인기도 대단했다. 그가 재혼으로 맞은 아내 헬레나는 폴란드 적십자의 전신 백십자단을 조직해 전선에서 병사들을 돌봤다. /미 의회 도서관·워드프레스·모르주 파데레프스키 박물관

음악가 중에는 “나는 음악밖에 모른다”며 사회에 무관심한 것을 고고한 자세로 여기는 사람이 있다. 그것도 하나의 신념이겠으나, 사회와 시대 배경을 무시하고 예술이 나오기는 어렵다. 바르샤바에서 매년 열리는 쇼팽 페스티벌의 명칭도 ‘쇼팽과 그의 유럽’인 것처럼, 한 음악가의 예술 세계를 그가 살았던 세계와 떼놓고 얘기할 수 없다.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Jan Paderewski·1860~1941)는 폴란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로 일세를 풍미하였지만, 또한 사회에 대한 관심과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폴란드 수상까지 지냈다. 그는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특출나게 잘 쳐서 쇼팽의 후계자로 일컬어졌다. 바르샤바음악원에 진학한 그는 사랑하는 여학생을 만나 일찍 결혼했고, 아들을 출산했다. 그런데 해산 3주 만에 산모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게다가 남겨진 아들은 중증 중복 장애아였다. 겨우 스무 살이었던 파데레프스키는 혼자서 아이를 키우며 연주와 공부를 해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인이 아들을 맡았다. 파데레프스키는 크게 자책했다. 그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아내를 죽게 하고 아들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평생 짓눌렸다. 대신에 그는 남은 생애를 음악에 바치겠다고 거듭거듭 기도했다. 그리고 베를린예술대학으로 가서 작곡을 공부한다.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파데레프스키는 점점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는 뛰어난 음악성과 현란한 기교, 그리고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매력적인 모습과 카리스마로 당대에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로 부상한다. 특히 미국에서의 인기는 대단하여 평생 미국에서 30여 차례의 순회 연주를 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청중이 쇄도했고 지역 인사들이 그를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파데레프스키는 음악회의 성공에서 자신의 부와 명성만 추구하지 않았다. 당시 그의 조국 폴란드는 이른바 3국 분할 시대로, 1795년부터 주변의 세 강대국인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가 분할 점령하여 폴란드가 지도상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100년 이상이나 나라를 잃었던 것이다. 또한 파데레프스키는 피아노만큼이나 연설을 잘한 웅변가이기도 했다. “신은 그에게 청중을 사로잡는 두 가지의 탁월한 능력을 주셨는데, 하나가 피아노고 다른 하나가 연설이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의 피아노 연주뿐 아니라 연설을 들으려고도 군중이 운집하였다. 그런 그는 어디서나 폴란드를 내세우고 조국의 독립을 외치고 다녔다. 특히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과 친분을 쌓아 윌슨에게 폴란드 독립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파리평화회의에 파데레프스키가 폴란드 대표로 참석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했다. 그리하여 폴란드는 123년 만에 조국을 되찾아, 폴란드 공화국이 수립됐다. 피우수트스키가 초대 대통령이 됐고, 독립에 혁혁한 공을 세운 파데레프스키는 총리 겸 외무부 장관이 됐다. 정치가가 된 그를 향해 음악인들은 “그는 정치를 하기에는 피아노를 너무 잘 친다”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계에 들어간 파데레프스키는 신생 정부가 자리를 잡자, 1년 만에 정치에서 은퇴한다. 다시 음악계로 돌아온 그는 제2의 음악 생활을 왕성하게 펼쳐서 연주뿐 아니라 많은 작곡도 한다.

파데레프스키는 음악가로만 활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연주로 벌어들인 큰 재산을 세상을 향해 썼다. 특히 소외받는 계층에 많은 기부를 했는데, 구빈원·고아원·병원 등 자선단체와 유대인과 집시 등 고통받던 소수민족들까지 망라한다. 젊은 음악가들과 음악원에도 기부했고, 유럽 곳곳의 여러 음악가 동상이 그의 헌금으로 세워졌다.

젊어서 아내를 죽게 하고 아들을 버렸다고 자책한 그는 다시는 사랑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뒤늦게 헬레나라는 지혜롭고 헌신적인 여인을 만나 결혼했다. 아내가 된 헬레나 파데레프스카야는 남편 이상의 사회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적십자단을 조직하여 전선에서 폴란드 병사들을 간호하는 등 많은 봉사를 했다. 그러나 국제적십자사는 폴란드가 독립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폴란드 적십자단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헬레나는 적십자기(旗)의 색을 뒤집어 백십자단을 만들고 폴란드 백십자단으로 활동을 계속했다. 나중에 폴란드가 독립하자 헬레나는 백십자단 조직을 조건 없이 폴란드 적십자사에 헌납했다.

그런데 독립 20년이 되던 1939년에 폴란드는 다시 나치 독일의 침공을 받았다. 그러자 여든을 바라보던 파데레프스키는 정계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런던에 세워진 폴란드 망명정부가 그에게 조국을 위한 헌신을 요청한 것이다. 그는 국가평의회의장 자리를 수락하고 런던으로 가서 방송을 통해 특유의 웅변으로 나치의 부당함과 폴란드의 독립을 만방에 외쳤다. 그는 구미 곳곳을 다니면서 방송을 하고 연설회를 열었다. 그렇게 마지막까지 조국을 위해서 몸을 사리지 않던 파데레프스키는 조국 해방을 보지 못한 채, 1941년 뉴욕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미국 정부는 외국인임에도 그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폴란드가 독립하고 공산주의가 종식되자, 1992년에 그의 유해는 고향 바르샤바의 성요한 성당으로 이장됐다. 하지만 그의 심장은 생전에 왕성한 활동을 했던 미국 땅 펜실베이니아의 성모성지에 봉안됐다. 지금도 폴란드인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음악가일 뿐만 아니라, 조국의 아버지로 추모한다. 그는 역사상 음악가로서 가장 많은 사회적 활동을 하고 높은 결과를 이루어낸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