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어 나무를 보니, 어느새 잎사귀가 다 노랗다. 눈이 먹먹하도록 바람의 잔영을 만들어내던 여름의 경쾌한 잎사귀들이, 툭툭 큰 힘으로 낙하한다. 스윙과 꺾임이 어우러진 춤처럼, 거리의 시계추는 한 번도 실수하는 법이 없다. 여름에서 가을로, 겨울에서 봄으로… 시간은 순환하며 직진하고, 우리는 쓸쓸함을 뒤로한 채 자연이 준비한 황홀을 맞는다. 꽃놀이, 물놀이, 단풍놀이… 굳이 호들갑을 떨며 계절을 맞는 이유는, 중력의 한 점으로 사는 내가 흘러가는 시간을 잠시라도 붙잡아 인사하고 싶어서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때로는 인간에게 시간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에게 인간이 잠시 맡겨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태양의 공전(계절)과 지구의 자전(밤낮)처럼, 규칙적인 ‘순환’과 ‘흐름’에 안도하면서도, 인간은 ‘나만의 생’을 감각하기 위해 각자의 방식대로 안달복달한다. 시간을 뒤섞은 내러티브와 시간을 첨삭하는 리듬으로, 죽기 전까지 ‘나라는 정체성’을 편집해간다. 열린 마음으로 낯선 것과 섞이고, 좋은 자세로 홀로 반복하며 제 몫의 루틴을 찾아가는 것이다.

세상의 회계장부는 ‘더할 것인가, 뺄 것인가’ 자원의 추적이지만, 시간의 회계장부는 ‘더 할 것인가, 멈출 것인가’ 리듬의 누적분이다. 그런 식으로 숨죽인 발자국, 돌이킨 발자국, 나아간 발자국, 맴도는 발자국들은 시간과 나만 아는 비밀스러운 탭댄스다. 우리는 안다.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의 순간도, 지금 죽어도 좋을 것 같은 환희의 순간도 다 지나간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살아있는 모든 것의 곁을 ‘노 룩 패싱’ 해버리는 자비 없는 시간의 자비다. 그런 무자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는 젊었거나 늙었거나 제 나름의 정당한 환각으로 생의 ‘한가운데’를 지나가는 중이다.

그러던 중 최근 나는 세 개의 흥미로운 시간 풍경을 목격했다. 첫 번째는 ‘죽기 전에 단 한 곡의 노래로 단 하나의 무대를 만든다면’이라는 미션으로 제작된 넷플릭스의 음악 예능 ‘테이크 원’이고, 두 번째는 컴컴한 동굴에서 시계 없이 40일간을 지낸 15인의 체험을 기록한 책 ‘딥 타임’이다. 세 번째는 ‘뛰는 사람’을 쓴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의 80년 생애, 그 자체다.

나는 앉은자리에서 넷플릭스의 ‘테이크 원’ 시리즈 7편을 다 보았다. ‘전무후무한 무대를 만들라’는 제안과 함께 공연까지 남은 시간을 알리는 타이머가 주어지자 아티스트들은 당황했다. 깜빡이는 액정의 숫자는 피를 말렸다. 난도 높은 ‘인형의 노래’를 부르며 꼭두각시 춤을 추던 조수미는 리허설 전에 긴장으로 주저앉았다. 200명의 댄서와 스카이다이버를 동원해 합을 맞추던 AKMU는 “우리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나(수현)” 감격을 쏟아냈다.

7년 동안 무대를 잊고 살던 임재범이 수북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깎고 재개발 아파트 옥상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마이크를 잡을 때, 박정현이 한강에 바지선을 띄우고, 마마무가 바람 부는 무대에서 시간의 터널로 후진할 때, 비가 청와대 카펫 위에서 밤이슬을 맞으며 땀을 쏟을 때… 그 반복과 리듬으로 완성시킨 ‘원 테이크’의 희열은 강렬했다.

나는 탄복했다. ‘나의 서사가 너의 서사가 되고, 너의 리듬이 나의 리듬이 될 때… 시간과 직면하는 인간의 무리는 이토록 울창하고 박력 있구나!’ 시계도 해도 없는 롱브리브 동굴에서 40일을 지낸 사람들의 경험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각자 잠들고 깨어났지만 그들은 서로의 생체 리듬이 비슷해졌다고 했다. “사회 시계는 해시계만큼 아름답고 강력했어요!”라고 리더 크리스티앙 클로는 나와의 인터뷰에서 고백했다. 따로 또 같이, 리드미컬한 사이클을 사는 생활이 즐거워 다들 동굴을 나오기 주저했다고.

시한폭탄 같은 시간의 압박에도 꿈의 무대를 이뤄낸 ‘테이크 원’의 스태프도, 시계 없는 유토피아를 경험한 동굴 생활자들도, 생체 시계의 비밀을 풀어 가며 오늘도 지구를 네 바퀴째 달리는 노장 생물학자 베른트 하인리히도… 이들이야말로 시간과 동행하는 위대한 ‘딥 타이머(Deep Timer)’가 아닌가 싶다.

지난여름. 나는 한평생 원시 인류처럼 숲을 달리며 꽃과 벌과 인간의 생체 시계를 관찰해온 하인리히에게 질문했다. “혹시 선생도 시간이 주인공인 세계에서 미끄러지는 느낌이 든 적이 있는지요?” 시간 생물학의 대가가 웃으며 답했다. “있지요. 환갑이라는 나이가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와 저도 충격을 받았답니다.” 그 말이 왜 그토록 위로가 되던지. 가을이 깊어간다. 더 늦기 전에 지리산 화엄사에 가서 찬란한 단풍을 보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