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지난 7월 16일 러시아에 입국해 다음 달 초까지 머물 예정이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지 5개월 가까이 지난 러시아 현지 분위기를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훗날 논문과 책을 쓸 자료가 될 것이다. 이번에 3년 만에 모스크바로 들어왔을 때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입국 심사대에서 “3년 전에 우크라이나는 무슨 일로 갔나?”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는 이곳이 전쟁 중인 국가임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 후 일주일간 모스크바와 카잔을 거닐면서, 이 나라가 전쟁 중인 나라가 맞는지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직은 주요 도시 중심부만 돌아보았기 때문에, 러시아의 전체적 상황을 다 보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거리에서, 공원에서, 식당에서 시민들의 일상적 삶에서 전쟁의 영향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 분위기는 너무나 평화로웠다. 전쟁을 독려하는 국가 프로파간다, 특히 러시아에서 새롭게 등장했다는 전쟁 상징인 알파벳 ‘Z’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모스크바 최고 중심부의 버스 정류장에서 ‘러시아와 돈바스의 아이들을 위하여’라고 쓴 광고판 따위를 두세 번 본 것이 전부다. 3년 전보다 물가가 무척 오르기는 했지만, 물가야 지금 전 세계가 전부 오르고 있지 않는가. 적어도 시민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한다는 점에서, 러시아 경제는 서방의 전면적 경제 제재에도 견딜 수 있는 상당한 내구력을 입증한 것 같았다.

전쟁의 여파를 실감한 것은 의외의 영역이었다. 3년 사이에 러시아는 놀라울 정도로 무(無)현금화가 진행된 상태였다. 전에는 할머니가 우두커니 앉아서 동전을 받던 공중화장실까지도 전부 카드기가 설치되었고, 현금을 안 받는 곳이 많아져 카드가 없으면 생활이 불편할 정도였다. 이런 변화는 분명 대단한 진전이다. 내가 경제 제재로 러시아에서 사용이 막힌 마스터카드 사용자라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러시아가 국제 결제망에서 배제되고, 대표적 국제 결제 카드인 비자와 마스터카드가 철수하면서 해외에서 러시아로 돈을 보내는 일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하지만 러시아 시민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전혀 불편 없이 카드를 일상생활 곳곳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러시아 자체 결제 시스템인 ‘미르’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러시아의 든든한 우방국이 된 중국의 알리페이를 받는 곳도 종종 볼 수 있었다.

내가 러시아에서 느낀 것은 전쟁의 긴장감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 잘 유지되는 평화 속에서 이제는 세계가 다시 본격적으로 갈라지고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러시아, 중국, 이란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 질서에서 떨어지더라도, 자신들만의 독자적 시스템으로도 생존할 수 있는 연대체를 건설하고 있다. 전쟁 전에는 서방의 관광객들이 몰렸던 트레치야코프 갤러리 앞의 맥도널드는 ‘맛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라는 문구를 내건 러시아 햄버거 집으로 대체되었다. 가게는 서방 관광객 대신 러시아 손님들로 북적였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미국 질서에서 대대적으로 이탈해도 버틸 수 있다는 그들의 자신감이 허언은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서독의 록밴드 스콜피온스가 철의 장막이 무너지는 ‘변화의 바람’이 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는 모스크바의 고리키 공원을 걸었다. 아마 스콜피온스가 바람을 느낀 1989년에도 비슷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은 달랐다. 우리 부모 세대는 청년기에 세계가 하나가 되는 바람을 맞았다. 우리 세대는 반대로 세계가 다시 둘로 나뉘는 바람을 맞게 되는 것 같다. 스콜피온스가 느낀 순풍보다는 거친 풍랑에 가까운 이 바람 속에서 슬기롭게 생존하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적어도 세계를 다시 가르는 이 바람을 만만히 여기지는 않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