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2009년 경제 위기 이후 10년 넘게 이어진 사상 최장기 호황장(bull market)이 막을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주식시장에서 S&P 500 지수나 다우 지수가 고점 대비 20% 이상 하락하면 불황장(bear market)이라 부른다. 황소(bull)는 공격할 때 뿔을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고, 곰(bear)은 앞발로 위에서 찍어 내린다 해서 유래한 이름이다.

실리콘밸리에선 이번 불황장을 놓고 세대 간 입장이 확연히 갈린다. 2000년 닷컴 버블 붕괴, 2008년 경제 위기를 경험한 세대와 아직 불황을 경험해보지 않은 세대의 차이다. 전자는 이미 긴 겨울을 예상하고 긴축 재정과 인력 감축을 진행하고 있다. 실리콘밸리를 비롯해 전 세계 스타트업의 인력 감축 소식을 2020년 3월부터 집계하고 있는 사이트에 따르면, 6월 12일 기준 785개의 스타트업이 직원을 13만2024명 해고했고 이 숫자는 매일 빠르게 올라가는 추세다.

반면 20~30대 젊은 창업가 대부분은 이전의 장기 불황을 경험하지 못해서 그런지 위기의식이 상대적으로 덜한 것 같다. 특히 코로나 초기에도 급격한 시장 반등으로 위기를 금방 넘겼기 때문에 이번도 “조금만 버티면 금방 지나가겠지” 하고 막연히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하다.

이번 불황장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누구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성장과 생존을 외부 자본에 의존하는 스타트업은 새로운 현실에 대한 냉정한 준비가 필요하다. 스타트업이 소위 망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 돈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10년 이상 이어진 최장 호황장에서 스타트업에 투자해 왔던 벤처캐피털과 성장 펀드들이 가장 걱정하는 것은 기존 투자 업체들의 생존이다. 이 때문에 스타트업들은 신규 투자를 받기가 쉽지 않다. 신규 자금 조달이 어려우면 결국 기존 투자가에게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문제는 기존 투자가들의 펀드 규모로는 모든 투자 업체를 살리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때 투자가들은 소위 ‘부상자 분류’(triage)라는 어려운 결정을 하게 된다. 전쟁 중 제한된 의료진과 약으로, 살릴 가능성이 높은 환자부터 우선 치료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가장 중요한 분류 기준은 얼마나 ‘자생력이 있는가’이다. 이미 비즈니스가 자리 잡아가고 있고 스스로 긴축 재정과 인력 감축을 통해, 투자가들이 상대적으로 적은 자본과 노력으로도 살릴 수 있는 업체가 당연히 선택받게 된다. 그렇지 못하면 선택받지 못하고 결국엔 망하게 된다. 필자가 20여 년 전 싱가포르계 국부 펀드 버텍스(Vertex)의 투자팀 막내로 벤처 투자에 입문할 당시, 온종일 부상자 분류 회의를 하며 ‘살생부’ 만드는 걸 목격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돈이 언제 떨어질지 예측하기 위해선, 시장 상황에 따른 시나리오가 필요하다. 제품과 기술 개발, 영업 계획을 아우른 기존 시나리오 외에 빠른 시장 회복을 기대하는 긍정적 시나리오, 그 반대의 부정적 시나리오를 모두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각 시나리오에 따라 생존을 위한 긴축 재정과 인력 감축안을 고려해야 한다. 누구도 불황장이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기 때문에 부정적 시나리오 위주로 준비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부정적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다 현실이 나아지면 대응이 가능하지만, 반대인 경우 대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수많은 벤처 투자가는 기존 투자사들에 현재의 불황장에 대한 수많은 조언과 경고를 쏟아내고 있다.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존경받는 투자사인 세쿼이아캐피털 (Sequoia Capital)은 지난달 ‘생존을 위한 적응’(Adapting to Endure)이란 제목의 52장짜리 자료를 투자사들에 배포했다. 자료 앞머리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지난 수년간 자본 확보가 쉬웠던 상황에선 굳이 하지 않아도 됐던 어려운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할 상황이 왔다. 이런 어려운 선택과 결정을 언제, 어떻게 하는가에 미래의 성공은 물론 생존이 달려 있다.”

지난 수년간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도 거대한 도전을 받게 됐다. 실리콘밸리 못지않은 기업 가치로 투자받았던 곳들은 향후 그 가치의 배수로 투자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아직 자생력을 갖추기 못한 스타트업 중 성장만 생각하고 생존 준비를 소홀히 한 업체들은 부상자 분류에서 선택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창업가들이 먼저 용기 있는 판단과 결정을 해야 투자가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다. 바로 지금이 어려운 결정을 해야 하는 시점이다. 이런 어려움을 딛고 생존하는 업체가 결국 성공하는 업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