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빼놓지 않고 보는 드라마가 있다. 토일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극본 노희경)다. 제주에 터 닦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옴니버스 연작으로 펼치는 보기 드문 수작(秀作)이다. 특히 지난 토요일 방송된 ‘영옥과 정준 그리고 영희 2′ 편은 이름난 탤런트들의 열연만이 아니라 ‘영희’로 분한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 ‘정은혜’의 결코 연기 같지 않은 생생한 ‘등장’과 그녀가 떠난 후 남겨 놓은 ‘그림’ 때문에 나도 모르게 울컥하며 솟는 눈물을 참아낼 수 없었다.

/일러스트=박상훈

# 드라마 밖에 실존하는 정은혜는 1990년생으로 올해 나이 33세이지만 다운증후군을 앓고 있어서인지 여전히 덩치 큰 아이 같다. 그녀의 어머니는 스물여섯 살에 낳은 첫 딸이 백일도 채 안 돼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롤러코스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랐다가 그냥 거꾸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의사마저도 “열여섯 살까지나 살까?”라고 말할 정도였기에 그야말로 ‘절망이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방송을 통해 뉴질랜드의 다운증후군 발달장애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딸도 절망과 이별하고 행복을 찾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만 먹는다고 이뤄지는 게 아니었다.

# 은혜가 학교를 다닐 무렵 학예회가 열린다 해서 가보면 어느 무대에서도 아이를 찾아볼 수 없었다. 혼자 교실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발달장애인에게 진짜 현실은 더불어 함께할 기회는커녕, 존재 자체가 외면당하는 ‘사회적 실종 상태’ 그 자체였다. 그래도 은혜는 이리저리 학교를 옮겨 다니며 가느다란 사회적 끈이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녀는 자기 방문을 걸어 잠그고 4년 넘게 자기 동굴 속에 스스로를 가둬버렸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퇴행’하며 조현병까지 얻었다. 문을 걸어 잠근 채 혼자 소리 지르고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나 이제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어. 이제 이 차별의 세상 정리할래” 하는 극단적 순간도 맞이했었다. 본인도 힘겨웠겠지만 그때 함께 겪은 가족들의 고통 또한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 그러던 은혜가 삶을 포기하려던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그림’ 덕분이었다. 그녀는 스물여섯 살 되던 2016년 8월 양평 문호리의 북한강변에서 매월 세 번째 주말에 지역 토산물들의 난장(亂場)이 펼쳐지던 ‘리버마켓’에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여름에는 천막 아래 찜통더위에 땀을 비오듯 흘려 엉덩이에 종기가 그치지 않을 정도였다. 겨울에도 변변한 난로 하나 없이 강바람 부는 곳에 한나절을 앉아 손이 곱아들다 못해 다 트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그리기를 그치지 않았다.

# 한데 그녀가 그린 것은 풍경이 아니었다. 다름 아닌 ‘니 얼굴’이었다! 강변에 펼쳐진 리버마켓 천막 부스 안으로 누군가 들어와 뭔가를 그리고 있는 그녀에게 “뭘 그리고 있냐”고 물으면 은혜는 듣기엔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니 얼굴!”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그렇다. ‘니 얼굴’ 곧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캐리커처로 그리기 시작한 것이다. ‘캐리커처’란 누군가의 특징을 포착해 묘사하는 그림이다. 은혜가 캐리커처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누군가의 외모적 특성을 파악했다는 얘기만이 아니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치려고만 했던 그녀가 애써 회피하지 않고 누군가와 ‘eye-to-eye’, 즉 눈맞춤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하나의 관계적 도약, 아니 ‘생(生)의 도약(élan vital·엘랑 비탈)’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눈맞춤해가며 리버마켓에서 그린 그림이 족히 4000장이 넘는다. 그 한 장, 한 장이 쌓여 마침내 은혜 자신의 ‘생의 도약’을 이룬 것이다. 은혜의 어머니가 스물여섯에 그녀를 낳았다면, 은혜 자신도 스물여섯에 동굴 속에 갇혀있던 자신을 끄집어내 사람들의 ‘니 얼굴’을 그리는 캐리커처 화가로 스스로를 다시 세운 셈이다.

# 하지만 현실은 ‘은혜’와 같이 동굴 밖으로 나온 이들보다 여전히 동굴 안에서 죽기보다 싫은 삶을 부둥켜안은 채, 힘겹게 살아가는 발달장애인들과 가족들이 훨씬 많다. 지난달 23일 서울 성동구에서는 40대 어머니가 발달장애가 있는 여섯 살 아들을 안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 같은 날 인천 연수구에서는 60대 어머니가 30대 뇌병변 중증장애인 딸에게 수면제를 먹여 숨지게 한 후 자신도 극단적 선택을 했지만 미수에 그친 사건마저 있었다. 오죽했으면 어미가 자식을 죽이고 동반 자살을 꾀했겠는가. 이 숨길 수 없는 현실을 알리고자 엊그제 인천 지하철 1호선 인천시청역 지하 1층엔 한 평 남짓한 공간에 발달·중증장애인 참사 분향소가 차려졌다. 지난 26일 용산의 윤석열 대통령 집무실 근처인 서울 지하철 4호선 삼각지역에 이어서 두 번째 차려진 분향소였다. 거기 내걸린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은 오가는 사람들에겐 그저 낯선 구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부모와 자식이 동반 자살의 길로 내몰리는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겐 “함께 살려 달라”는 피눈물 나는 절규다.

# 상처 입은 유기견과 유기묘에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쏟고, 집무실에 발달장애인 화가들의 그림을 걸어놓고서 이것을 바이든 미국 대통령에게 설명까지 했던 윤 대통령이니만큼 이들의 애끓는 절규를 귀담아들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다면 이제 ‘발달장애인 24시간 지원 체계 구축’에 대통령이 직접 나서 달라! 아울러, 정은혜 작가의 이야기를 담은 다큐 영화 ‘니얼굴(서동일 감독·은혜의 아버지다!)’이 오는 23일 개봉한다고 한다. 절망에 익숙하고 희망마저 불편해하는 우리 시대의 모든 이들이 보기 바란다. 함께 손 맞잡고 기어이 살아내자는 의미에서 오늘도 ‘니 얼굴’을 그려주는 은혜씨에게 마음 다해 박수와 응원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