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미국 정부는 가까운 동맹국인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여왔다. 1980년대 내가 몸담았던 주한 미국대사관 및 영사관에서도 한국의 선거를 예의 주시했다. 1985년 2월 12일, 나는 한국의 한 강당으로 파견됐다. 제12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과정을 참관하기 위해서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었고 어둑한 조명의 강당 내부는 막바지 과정을 감독하는 정부 측 관계자들로 북적였다. 선거 관리원들이 개표를 위해 녹색 철제 투표함을 다른 장소로 옮기려 하자 실랑이가 벌어졌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르고 멀뚱히 서 있었다. 당시 미국 정부는 한국 각지의 투표소로 최대한 많은 수의 참관인을 보냈다. 한국어도 서툴고 어떠한 권한도 없던 24세 꺽다리 미국인 외교관으로서는 도무지 ‘무엇을’ 참관하라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한 가지 분명했던 것은 수많은 인파 중 녹색 철제 투표함의 행선지에 대해 다투지 않았던 유일한 사람이 나였다는 점이다. 투표함을 짊어진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이동하려 하면 다른 인파가 이를 거칠게 막아섰다. 소동이 꽤 오랜 시간 이어졌고, 마침내 경찰을 대동한 관리원이 투표함을 이송하면서 마무리되었다. 솔직히 이 시점에 개표가 이루어졌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동안 너무 당연히 여겨왔던 투표권의 중요성에 대해 본능적으로 절감한 순간이었다.

이후에 한국에서 경험한 선거는 훨씬 더 흥미진진했다. 대통령 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1992년, 나는 대사관에서 고급 한국어 과정을 수강하고 있었다. ‘3김(三金·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시대’를 이끈 김영삼, 김대중 당시 후보가 대권을 놓고 경쟁하던 이때, 지역별 유세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느껴보고 싶어 이틀간 지방 여행을 떠났다. 정말 흥미롭고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두 후보의 유세 역시 긴장감이 넘쳤고 연설의 영향력도 대단했다. 각 지역 주민들은 지지하는 후보의 유세에 열화와 같은 성원을 보내주었다. 군중 속에서 나를 발견한 한 지역 정치인이 저녁 식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김영삼, 김대중 두 후보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한국의 지역사회 성향과 후보에 대한 열정, 그리고 선거운동이 얼마나 사람들을 단합시키는지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2016~2017년 한국에서 촛불 집회를 목도하면서, 한국 민주주의의 흥망성쇠를 한눈에 보는 것 같았다. 우선 합법적인 선거로 뽑힌 대통령을 몰아내려고 수십만명이 공개적으로 모이는 장면에 놀랐다.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청와대가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고 국회와 법원도 움직이지 않아 다른 방법은 없다고 여기는 것으로 보였다. 그래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내가 봤던 한국의 선거와 시위에 내재되었던 깊은 분노에 비하면, 평화적 시도로서 이전보다 한발 더 나아간 것으로 본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한국 역시 앞으로 마주할 도전 과제가 산적해 있다. ‘3김 시대’에 팽배했던 지역주의와 출신 후보 중심의 정치적 편향은 줄었지만, 오늘날 여야 정당의 정치 양극화는 심화돼 도무지 이견을 줄이지 못하는 현상이 만성화됐다. 이런 가운데 한국이 정치·경제적 위상에 걸맞은 글로벌 리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과제도 안고 있다. 이미 동맹국과 이웃 국가들은 한국에 대한 강한 기대감을 내비치고 있다. 한국은 역동적인 경제와 확고한 민주주의 기반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세계에 입증할 책무가 있다.

수십 년간 한국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온 나는 한국이 정치적 난관을 잘 극복할 것이라 확신한다. 한국 근대사를 돌아보면 공정성과 투명성이라는 가치가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스며드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22년 대선을 앞두고 선거운동이 막바지에 다다를 때, 나는 사무실이 광화문에 위치한 덕분에 일대를 산책하며 선거 진행 상황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무용단과 가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된 무대와 칼군무 등 1980~1990년대와 비교하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의 집회들이 열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인상 깊었던 것은 내가 수십 년 전에 실감한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와 더 나은 사회를 향한 헌신이 오늘날에도 건재하다는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대한민국에 대해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갖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