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어붙은 런던 템스강 위에 열린 장터… 축구·볼링·썰매 경기도 벌여 - 1600년부터 1814년까지, 겨울이면 영국 런던 템스강이 자주 얼어붙었다. 런던 사람들은 두꺼운 얼음 위에 온갖 상점이며 주점 등을 세워 ‘템스강 얼음 장(Thames Frost Fairs)’을 열고, 축구와 볼링, 썰매와 스케이트 경기도 벌였다.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았던 이 시기, 사람들은 얼어붙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걸어서 건넜고, 스웨덴군은 발트해의 얼음 위를 건너 덴마크 코펜하겐을 공격했으며, 이탈리아인들은 베네치아의 꽁꽁 언 호수 위에서 스케이트를 탔다. 네덜란드 출신으로 잉글랜드에서 활동했던 화가 얀 그리피어가 그린 1683년 겨울 템스강 얼음 장 풍경. /게티이미지코리아

루이 14세 시대의 궁정인으로서 흥미로운 회고록을 남긴 생시몽 공작(Duc de Saint-Simon)은 1709년 겨울 추위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겼다. “그해 겨울은 참혹했다. 극심한 혹한 때문에 베르사유 궁전에서 향수, 증류주, 알코올 도수가 높은 독주 병들이 깨졌고, 빌루아 공작의 저택에서 식사를 하는데 잔 속에 얼음 덩어리들이 떨어졌다.” 왕궁이나 대귀족 저택도 얼어붙는 추위에 시달렸던 것이다.

1708년 가을부터 벌써 추위의 조짐이 보였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1708년 10월부터 1709년 3월까지 모두 7번의 혹한이 이어졌다. 이 시기에는 이미 온도계가 발명되고 널리 보급되어서 당시 추위가 어느 정도였는지 비교적 믿을 만한 수치 자료를 구할 수 있다. 예컨대 의사이자 식물학자로서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회원인 루이 모랭(Louis Morin)은 1655년부터 1712년까지 거의 매일 온도를 측정한 기록을 남겼다. 이런 자료들을 보면 1709년 1월에는 파리의 기온이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진 날이 19일이나 되었고, 특히 1월 20일에는 영하 20.5도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날은 파리 역사상 지난 500년 중 가장 추운 날로 기록될 것이다. 남쪽의 마르세유도 1월 11일에 영하 17도를 기록했다.

6개월 동안 7번의 혹한 닥쳐

이상저온 현상은 전국적으로 큰 피해를 가져왔다. 루아르 지역 부지(Vougy) 마을의 사제는 이런 기록을 남겼다. “1월 6일부터 추위가 시작되었고, 이후 5~6일 동안 지속된 추위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정도다. 1월부터 밀 가격이 오르기 시작하더니 6월까지 지속적으로 상승했다. 빈곤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절도 행위에 나섰다…. 기근이 너무 심해서 길거리에서 동냥하다 굶어 죽은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개와 늑대가 뜯어 먹은 시체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우리 교구 사람 절반이 죽었고, 아이들은 거의 볼 수 없다.”

사실 이상저온 현상은 이전과 이후 시기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피해 규모로만 본다면 1693~1694년이 훨씬 더 심했다. 이 시기에는 겨울 추위뿐 아니라 여름 홍수와 냉해가 커서 2년 연속 심각한 흉작을 겪었다. 식량 부족으로 사람들이 잘 못 먹으면 몸이 약해져서 질병 피해도 극심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기간에 프랑스에서 죽은 사람들 수에 대해 연구자들은 최소 160만명부터 최대 284만명까지 제시한다. 제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전사자에 맞먹는 수치인데, 20세기에 비해 인구가 절반 수준이고 단 2년 동안 일어난 사태임을 고려하면 실로 끔찍한 피해라 할 것이다.

이 시대의 이상저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후사라는 새로운 분야의 개척자들은 ‘소빙하기(Little Ice Age)’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원래 이 말은 지질학적으로 수천 년에 달하는 긴 기간을 포괄하지만 역사학에서는 대체로 중세 말부터 19세기까지 기간을 가리킨다. 특히 17세기부터 18세기 초까지가 소빙하기 중에서도 가장 기온이 낮았던 때이다. 1600년부터 1814년까지 겨울에 템스강이 얼어붙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런던 사람들은 ‘템스강 얼음 장(Thames Frost Fairs)’을 열었는데, 온갖 상점들과 맥줏집(pub)이 들어서고 축구와 볼링, 스케이팅 경기가 벌어졌다. 1620년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결빙하여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걸어서 건너갈 수 있었다. 1658년 발트해가 결빙하자 스웨덴군은 얼음을 건너 코펜하겐을 향해 공격해 갔다. 1709년에는 베네치아의 석호(潟湖)가 얼어붙어 이탈리아인들도 스케이트를 탈 수 있었다.

카를 12세, 표트르 대제

이런 심각한 기후 이변 시기에도 국왕들은 여전히 전쟁에만 몰두하여 사태를 악화시켰다. 72년에 이르는 루이 14세의 긴 치세의 거의 절반이 전시였다. 1701년부터는 에스파냐 왕위를 손자에게 물려주고 더 나아가서 에스파냐를 사실상 합병하려 시도했다가 거의 전 유럽을 상대로 한 전쟁에 들어갔다. 흉작과 전염병으로 국민이 고통을 겪는 상황에서 전쟁이 지속되니 거의 망국의 위험에 직면했다. 1708년 7월 11일 아우데나르드(Audenarde) 패전 이후 적군의 침공 위협이 커지자 한때 국왕이 루아르 이남으로 피신하려 했을 정도다. 바로 그 이후 시기에 앞서 언급한 끔찍한 추위를 겪은 것이다. 동유럽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웨덴 국왕 카를 12세는 발트해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동유럽 각지를 휘젓고 다녔다. 1708~1709년 겨울, 그의 군대는 최악의 한파에 시달렸다. 종군 목사의 기록은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잊을 수 없는 추위였다. 침을 뱉으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얼음이 된다. 어떤 병사는 손이 없어졌고, 어떤 병사는 발이, 또 어떤 병사는 손가락, 얼굴, 코, 귀가 없어졌다. 다른 사람들은 네발짐승처럼 기어다닌다.” 참혹한 겨울을 나니 병력이 절반으로 줄었다. 그 후 5~6월에 오늘날 우크라이나에 위치한 폴타바라는 작은 요새에서 러시아군에 패배하여 스웨덴은 북유럽의 최강자 지위를 잃었다.

침을 뱉으면 얼어서 땅에 떨어져

전쟁에만 신경 쓰다 보면 당연히 민생에는 소홀할 수밖에 없다. 가공할 혹한이 지나 1709년 봄이 되니 프랑스의 농촌에서는 냉해로 인해 지난가을에 파종한 작물을 모두 잃을 위험이 커졌다. 정확한 사태 파악과 현명한 결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지난 파종을 모두 갈아엎고 새로운 봄 작물로 대체 파종해야 하는지 아닌지 정해야 할 터인데,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약 100년 전 앙리 4세 시대에 겨울 추위가 심각했을 때 수확이 그리 나쁘지 않았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방의 지사들은 현지의 급박한 사정에 대해 보고서를 올리는데, 궁정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있었다. 그들은 농민들의 주장을 무식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무시하거나 혹은 일부러 루머를 퍼뜨려서 가격 인상을 유도하는 투기꾼의 농간일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지사들에게 사정을 너무 과장하지 말고 또 지방민들을 공공연히 자극하지 말라는 답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을 허비하다가 4월 말이 되어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식했다. 이제는 재파종이 불가피하다는 게 분명해졌다. 이런 결론에 이르기까지 중앙정부는 혼란을 가중시켰다.

농민봉기 200여 차례 일어나

그나마 늦게라도 대처 방안을 긴급히 마련한 게 다행이었다. 비축 식량의 양을 확인하기 위해 곡물을 보유한 사람들의 신고를 의무화했다. 이때에도 우선순위는 군사물자 확보에 두었다. 여유가 있는 지역에서 식량을 확보해 군비를 채우고자 한 것이다. 보리 재파종을 독려하기 위해 보리를 보유한 사람들은 시장에 내놓을 것을 명령했고, 맥주 제조를 금지했다. 북유럽과 지중해 지역에서 곡물 수입을 추진하려 했지만 자금이 부족했다. 그래서 대상인들에게 높은 이자를 약속하고 돈을 빌렸다. 무엇보다 파종용 밀 종자 확보 방안을 찾고자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다음 해에는 더 큰 파국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여러 특단의 조치가 나왔다. 예컨대 땅 소유주가 죽은 경우 그 밭을 놀리게 되는데, 이때 누구든지 그런 땅에 파종하여 농사를 지으면 수확은 그 사람 것이 된다고 포고했다. 가을 수확 후에는 수확량을 먼저 보고한 후 탈곡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역효과를 냈다. 보고를 위해 한 달을 지체하는 통에 기근 사태가 더욱 악화되었다. 이처럼 우왕좌왕하느라 위기 사태는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1709년에 농민들의 봉기가 200차례 가까이 일어났다.

대개 그러하듯 천재지변은 동시에 인재(人災)의 양상을 띤다.

[소빙하기 원인은]

베수비오·후지산 등 4개 큰 화산 일시에 폭발… 당시 태양 흑점 이상설도

1707~1708년 사이 엄청난 분진을 대기 중에 뿜어낸 이탈리아 베수비오 등 큰 화산 네 개의 폭발도 소빙하기 혹한의 원인을 설명하는 가설 중 하나다. 17세기 나폴리 화가 도메니코 가르줄로가 그린 1631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 /위키피디아

17~18세기에 유독 기온이 내려간 이유에 대해 연구자들은 아직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한 채 다양한 가설을 검토하는 중이다. 1707~1708년 중 이탈리아의 베수비오, 그리스의 산토리니, 레위니옹 섬의 푸르네즈, 일본의 후지산(1707년 11월 11일과 12월 16일에 폭발했다) 등 4개의 큰 화산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 원인이 아닐까 추측하는 학자도 있다. 이때 분출된 분진들이 광범위한 지역에 햇빛을 가려서 온도가 내려갔을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양 활동의 불규칙성에서 원인을 찾아보려는 소위 몬더 미니멈(Maunder minimum) 가설도 있다. 갈릴레이 등 여러 사람들의 천문 관찰 기록을 보면 1645~1715년 태양 흑점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태양왕 루이 14세 시대는 오히려 태양에 이상이 발생한 때였다. 일부 연구자는 남북 아메리카에 유럽인들이 들어와서 현지 주민들을 몰살한 이후 숲이 엄청나게 확대된 것이 원인이 아닐까 하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하기도 한다. 오늘날 숲의 남벌로 인한 기후온난화와 반대되는 현상이 일어났으리라는 주장이다.

이런 가설들 중 어느 하나 확실한 것은 없다. 무엇보다 지구 모든 곳에서 똑같은 기후변화가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데에 설명의 어려움이 있다. 유럽에서 혹심한 추위를 겪었던 1708~1709년은 숙종 34~35년에 해당하는데, 가뭄과 가을장마 현상이 발생했을 뿐 혹한 이야기는 없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이런 문제를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갈수록 환경의 역사가 중요해지리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