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몰고 달아나는 용의자를 바라만 볼 리가. 뺏다시피 남의 오토바이 잡아타고 쫓는다. 난장판 된 길을 헤치지 못하나 싶더니. 선임 형사가 교차로에서 그 차를 들이받는다. …. 할리우드 액션에 숨 막힌다면 우리 현실엔 말문이 막힌다. 눈앞에서 칼부림이 났는데, 지원 요청 하고자 자리를 떴단다. 신개념 경찰 탄생. 말도 안 되는 일이려니와, 이 ‘탄생’은 과연 말이 될까.

사람, 특히 귀인(貴人)이 태어남을 가리키던 말이 탄생이다. 성탄(聖誕·성인이나 임금의 탄생)에서 보듯. 바람직하게 이름난 사람으로 대상이 점차 넓어졌다. ‘국어학자 최현배 선생 탄생 127돌’이 그렇다. 이제 표준국어대사전은 그냥 ‘사람이 태어남’이라 풀이한다. ‘34년 만에 다섯 쌍둥이 탄생’ 하는 식으로.

비유적으로 쓰다 보니 ‘조직, 제도, 사업체 따위가 새로 생김’이란 풀이가 덧붙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친(親)서방 정권이 탄생하면서’처럼. 사람이 어떤 지위나 상태에 이르렀을 때도 쓴다. ‘한 집안 현역 부사관 6명 탄생’ 같은 표현 말이다. 이런 정도야 가타부타 필요할까마는.

‘두 번째 경연에서도 대이변이 줄줄이 탄생할 것.’ 아무리 비유라 한들, 사람도 조직도 제도도 아닌 ‘이변’이 탄생한다 함은 부자연스럽다. ‘일어나다/벌어지다’같이 알맞은 표현이 있잖은가. ‘FA 시장 하루 만에 1호 계약이 탄생했다’도 마찬가지. ‘이뤄지다/성사되다’라 쓰면 적확할 텐데. 이런 어색함을 뛰어넘어 영 거북스러운 ‘탄생’이 간혹 있다.

‘지금 바꾸지 않으면 또 다른 n번방이 탄생합니다.’ 어느 비영리 단체가 내걸었던 운동 구호다. 미성년자까지 협박해 성 착취 영상 찍고 퍼뜨린 채팅방이 ‘n번방’ 아닌가. 앞서 보았듯 몹쓸 일이나 대상에는 안 어울리는 ‘탄생’ 말고 ‘생긴다’ 하면 좋았으련만. 문맥 따라 ‘출현, 등장’으로 써도 된다.

우리는 상가에서 젓가락 장단 맞춰 흥얼대지 않는다. 쫄바지 레깅스 차림으로 혼례 올리지도 않는다. 몸가짐에 때와 장소가 있으니까. 말글살이도 좀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