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하고 있는 일에서 흥미를 느끼지 못해 고민이라고 했다. 회사나 산업이 마음에 들지 않냐고 되물었더니 현재 환경은 만족스럽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 조언은 간단했다. 원하는 직무를 할 수 있는 방향으로 틈틈이 경험을 쌓거나 공부를 하고, 그걸 잘하는 일로 만들라고. 말이 쉽지, 이게 얼마나 에너지를 써야 하는 일인지 안다. 나 역시 정유화학업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출판업을 거쳐 지금은 금융 서비스업에서 일하고 있다. 그새 공장을 짓다가 글을 짓는 일로 직무도 바꿨다. 산업과 직무를 바꾸는 데 대략 10년이 걸렸다.

/일러스트=박상훈

지인의 고민을 들으며, 서른 초반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당시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가능성과 ‘하나라도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 사이에 불안해하며 시간만 흘려 보냈다. 동시에 ‘왜 사나’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 기억도 난다. 살아있음의 과학적 정의는 유기물을 중심으로 신진대사를 한다는 것이다. 생명과학 관점으로 보면, 바이러스나 질병에 맞서 항체를 형성하며 꾸준히 먹고 싸고를 반복하다가 면역이 약해져 죽어가는 과정이 곧 삶이기도 하다. 이런 과학적 근거 앞에서 생의 의미를 찾는 게 과연 유효한 질문인가?

답 없는 고민을 계속한다고 답이 나오진 않는다. 다만, 그 시기를 거치며 자신과 합의한 답은 있다. 인생은 본질적으로 의미가 없다는 진리를 받아들일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왕 태어났으니 나만의 의미 정도는 찾아보자는 것. 그 후 자기 주도적으로 그 의미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시작했다. 의미가 없는 인생을 살며 불평만 하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의미를 만드는 방법 중 하나가 ‘일’이다. 문제는 내게 맞는 일을 발견하고 그걸 삶의 의미로 연결하는 과정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대부분 앞 단계부터 자신을 속이는 경우가 많지만, 간절함과 절박함이 있는 사람은 그 문제를 해결한다. 한 무명 가수 경연 프로그램에서 엿본 장면 하나가 떠오른다. 개인적으로는 방송 중 패자부활전에서 나왔던 노래 ‘숨’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패자부활전이라는 장치, 극적 편집, 깨끗한 음질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노래는 그 자체로 무대를 압도했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거의 만장일치로 패자부활전을 통과했다. 반짝이는 스타에 가까운 클래식 연주자에게도 절박함은 있다.

바이올리니스트 조진주는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번 생을 진짜로 빛나게 하려면 뭘 포기하고 가져야 할까. 본질이 경쟁인 고전 음악 분야에서 어떤 마음가짐과 철학을 가져야 할까.() 인생의 끝에서 삶을 돌아봤을 때, 내 지성과 그에 따른 행동의 무게가 순간적인 질투의 순간들보다 컸으면 좋겠다.” 스스로를 독립한 마케터로 소개하는 정혜윤은 ‘독립은 여행’을 통해 “꿈꾸는 사람으로 태어나 도달하고 싶은 곳을 그리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는 연인, 가족, 회사에서 독립하며 스스로 온전히 우뚝 설 수 있었다. “인생이란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곳이다. 문제가 없는 인생은 없다. 관건은 문제가 없는 인생이 아니라, 문제를 잘 관리하는 인생이다”라는 트레이더 김동조의 말처럼, 결국 삶의 묘미는 자신의 문제를 잘 관리하면서 한번쯤 반짝거릴 수 있도록 고군분투한다는 데 있다.

생후 100일을 앞둔 아기는 여전히 잠자는 데 시간을 쓴다. 가끔 아이의 미래를 상상한다. 진로를 고민할 테고 왜 태어났냐고 묻겠지.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송이도 언젠가 반짝일 수 있을까?” “매 순간 반짝이지.” “맞아, 그럼 어른이 되면서 총명함이 사라지는 걸까?” “부모 눈에는 여전히 반짝일걸? 본인은 모를 수도 있지만.” 수백만 광년 떨어진 별처럼 짙은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우리 인생을 긍정해본다. 우린 이미 반짝이고 있다고, 그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분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