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에도 우리나라 조선 업계는 세계 1위를 지켰다. 과거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큰 배들을 전부 끌고 가서 우리나라에는 100톤급 이하의 작은 배가 대부분이었다. 큰 배가 고장 나면, 일본과 대만에 가서 수리했다. 조선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962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어업차관 지불보증 승인안’을 통과시킬 계획이었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의 절반을 깨서 이탈리아 피아트사에서 중고 선박을 수입하기 위해서다. 그 배로 원양어업에 나선 다음, 저임금 노동력을 통해 통조림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가 그 회의장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 모인 혁명 세력들 앞에서 “통조림을 수출하려고 국가 경제의 최후 보루인 외환 보유액을 허물 수 없고, 만약 그래야 한다면 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뜻밖의 강한 반론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그날 의안 통과는 보류되었다.
박정희 의장은 고민 끝에 전략을 바꿨다. 어획량 증진을 뛰어넘어 조선업을 키우기로 용기를 낸 것이다. 그해 우리나라는 100톤급 배밖에 못 만들었다. 하지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에는 4000톤급 배를 진수시켰다. 이어 1967년 조선공업진흥법을 제정했다. 조선 강국이라는 불가능한 꿈의 시작이었다.
돌아보건대, 반대하는 것도 그 반대를 받아들인 것도 용기였다. 국가 개조를 위한 우선순위를 두고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으나, 민병도와 박정희의 고민과 용기가 대한민국 조선업을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만들었다.
1963년 오늘 민병도가 물러났다. 정부가 한은에서 은행 감독 기능을 분리하려는 데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였다. 한은법 개정 시도는 중단되고, 그의 재임 기간도 1년으로 멈췄다. 그러나 무소불위 혁명정부 앞에서도 늠름하게 사표(辭表)로 소신을 지킨 민병도는 한은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남았다. 흠모는 기간에 비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