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이섬에 있는 수재(守齋) 민병도(閔丙燾·1916~2006) 선생 동상. 제7대 한국은행 총재(1962.5~1963.6) 재임 때 정부의 무리한 어업 차관 도입 압력과 재무부의 은행감독원 장악 시도에 맞서며 '중앙은행 독립 정신의 상징'이 됐다. 은퇴한 뒤인 1965년 버려진 섬이나 마찬가지였던 남이섬을 사들여 나무를 심고 가꿨다. /나미나라 공화국 남이섬 홈페이지

지난해에도 우리나라 조선 업계는 세계 1위를 지켰다. 과거에 비하면 상전벽해다. 해방 직후 일본인들이 본국으로 철수할 때 큰 배들을 전부 끌고 가서 우리나라에는 100톤급 이하의 작은 배가 대부분이었다. 큰 배가 고장 나면, 일본과 대만에 가서 수리했다. 조선업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962년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어업차관 지불보증 승인안’을 통과시킬 계획이었다. 한국은행 외환보유액의 절반을 깨서 이탈리아 피아트사에서 중고 선박을 수입하기 위해서다. 그 배로 원양어업에 나선 다음, 저임금 노동력을 통해 통조림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였다.

민병도 한국은행 총재가 그 회의장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 모인 혁명 세력들 앞에서 “통조림을 수출하려고 국가 경제의 최후 보루인 외환 보유액을 허물 수 없고, 만약 그래야 한다면 총재직을 사임하겠다”고 선언했다. 뜻밖의 강한 반론에 회의장이 술렁였다. 그날 의안 통과는 보류되었다.

서울 소공동에 위치한 한국은행 전경. 앞쪽 초록색 기둥의 낮은 건물이 지하금고가 위치한 한국은행 화폐박물관(구관)이다.

박정희 의장은 고민 끝에 전략을 바꿨다. 어획량 증진을 뛰어넘어 조선업을 키우기로 용기를 낸 것이다. 그해 우리나라는 100톤급 배밖에 못 만들었다. 하지만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마지막 해에는 4000톤급 배를 진수시켰다. 이어 1967년 조선공업진흥법을 제정했다. 조선 강국이라는 불가능한 꿈의 시작이었다.

돌아보건대, 반대하는 것도 그 반대를 받아들인 것도 용기였다. 국가 개조를 위한 우선순위를 두고 두 사람의 생각은 달랐으나, 민병도와 박정희의 고민과 용기가 대한민국 조선업을 지금의 자리에 이르게 만들었다.

1963년 오늘 민병도가 물러났다. 정부가 한은에서 은행 감독 기능을 분리하려는 데 항의하는 기자회견을 연 뒤였다. 한은법 개정 시도는 중단되고, 그의 재임 기간도 1년으로 멈췄다. 그러나 무소불위 혁명정부 앞에서도 늠름하게 사표(辭表)로 소신을 지킨 민병도는 한은의 영원한 사표(師表)로 남았다. 흠모는 기간에 비례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