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이 동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갈등은 수년 전부터 인도양과 태평양으로 영역을 확대해 왔다. 인도·태평양 지역의 경제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고, 아시아·태평양으로 지칭되던 지정학적 초점은 서쪽으로 이동해 왔다. 여기에 유럽이 합류를 시작했다. 프랑스를 필두로 독일, 네덜란드가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하고, 유럽연합(EU)도 공동의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체스판’은 이제 인도·태평양으로 그 무대를 옮겨왔다.

아직 인도·태평양에 대한 지리적 범주나 개념은 명확하지 않다. 미국이 태평양으로부터 일본, 호주, 인도를 잇는 축을 중심으로 한다면 유럽은 아프리카 동부로부터 시작하는 인도양 지역과 남태평양 지역에도 관심을 둔다. 인도·태평양은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정치적, 전략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역내 4자 안보 협의체 ‘쿼드’는 이미 미국의 핵심 안보 체제로 부상했고, 확대된 형태의 쿼드 플러스가 논의되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정학에서 유럽의 참여는 이러한 전략적 공간의 개념과 성격을 크게 변화시킨다.

프랑스는 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인도·태평양 지역에 영토와 국민을 보유한 역내국이다. 프랑스가 ‘호주와 이웃한 섬나라’라고 하면 의아할지 몰라도, 프랑스령 뉴칼레도니아는 호주와 인접해 있고, 양국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프랑스는 인도·태평양 지역에 160만명의 국민이 있고, 영토 주권을 바탕으로 배타적경제수역을 설정하고 군사 활동도 지속해 왔다. 2018년 공식적인 인도·태평양 전략을 발표한 이후 프랑스는 인도, 호주, 그리고 일본을 잇는 연합 구도를 중심으로 조용히 역내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아 왔다.

중국과의 경제 관계를 중심에 두어 온 독일은 지난해 9월 ‘인도·태평양 정책 가이드라인’을 발표하며 다자주의, 자유무역, 그리고 인권과 규범을 중심으로 한 참여를 선언했다. 역사적으로 해상 강국이었고,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가졌던 네덜란드도 독일의 뒤를 이으며 이 지역에서의 유럽의 포괄적인 역할을 강조했다. ‘글로벌 브리튼’을 표명한 영국도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EU 외무장관들은 지난 4월 이사회 결론을 통해 교역, 안보, 인권을 포함한 인도·태평양 전략의 방향을 정하고, 오는 9월까지 공동의 지침을 마련하기로 했다.

유럽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다목적용이다. 일대일로 전략을 앞세워 공격적인 확장을 취해온 중국의 부상은 유럽의 입장 변화의 일차적인 요인이다. 유럽은 중국의 부상에 대한 레버리지 확보와 미국과의 동맹 공고화라는 장기적 포석을 두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의 등장과 대서양 동맹의 복원은 유럽의 입장을 표명하기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코로나 시기를 거치면서 중국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증가하고, 홍콩 및 신장 인권 문제로 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것도 유럽의 정치적 부담을 줄여주었다.

그러나 유럽이 미국 주도의 패권 경쟁에 무조건 동참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도·태평양 지역이 미국과 중국만의 패권 경쟁의 장으로 고착화되어 가는 것을 방지하려는 개입의 성격도 담겨 있다. 미국의 직간접적인 영향력이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유럽 자체적인 전략적 필요성이 반영되었고, 글로벌 외교에서의 위상에 대한 고려도 이루어졌다. 유럽의 인도·태평양 전략은 전통적 해양 안보뿐만 아니라 국제 무역 질서, 법치와 인권의 규범 외교를 포함한 다자주의에도 중점을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은 미국과 중국을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않는 신중함을 보였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중국을 견제한다는 차원도 있지만, 동시에 기회가 오면 협력과 진출의 교두보로도 활용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인도·태평양 지정학의 새로운 판짜기도 가속화되고 있다. 인도·태평양 전략은 이제 단순한 중국 견제의 성격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해양 안보뿐만 아니라 가치와 규범에 기반한 다자주의의 축으로 부상되었다. 인도·태평양의 인사이더가 되는 조건은 ‘뜻을 같이하는’ 국가이다. 인권, 법치, 민주주의와 같은 가치는 인도·태평양 전략에 참여하는 동맹 및 전략적 파트너들이 공유하는 기본적인 원칙이다. 그러나 중국을 자극하지 않고, 평양과의 대화 복원을 선결 과제로 내세운 한국은 이러한 가치 외교에 선뜻 참여하지 못하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중국과 북한을 동시에 다루어야 하는 한반도의 상황이 전제되어야 하지만, 한국이 정책적 모호성과 예외적 특수성을 계속해서 끌고 나가기에는 한계점을 넘어서고 있다.

인도·태평양의 거대한 지정학적 변화에서 한국이 아웃사이더로 남아 있을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뜻을 같이하는’ 동맹과 전략적 파트너를 얼마나 확보하는지가 새로운 지정학의 주체가 될 수 있을지를 결정한다. 범동맹 외교와 범가치 외교라는 과제를 두고 계속 머뭇거릴 수는 없다. 실제로 인도·태평양 지역에 한국의 교두보가 적지 않다. EU와 체결한 ‘포괄적 위기 관리 협정’은 국내에서는 큰 관심을 받지 못했지만 유럽이 가장 반기는 외교적 성과이자,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유럽과의 공조를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ASEAN 지역과의 교류를 늘려온 ‘신남방 전략’을 다자 차원에서 연계시키면 주요 동맹국들과의 접점을 만들 수 있다. 친미와 친중, 쿼드에의 참여와 불참의 양분법적 시각으로 인도·태평양의 새 판에 들어가기는 어렵다. 무엇을 제공하고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우물 밖을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