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시민아파트 건물이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현장 항공 촬영 사진. /조선일보 DB

T. S. 엘리엇은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말했다. 아주 오래 전 4·19혁명과 몇 년 전 세월호 사건이 떠오른다. 그 중간쯤에 와우아파트 붕괴 사고가 있다. 완공된 지 넉 달도 안 된 아파트가 한밤중에 무너져 잠을 자던 30여 명이 죽었다. 1970년 오늘이었다.

사고 직후 조사해 보니 모든 것이 엉터리였다. 깎아지른 산중턱의 아파트 단지를 불과 6개월 만에 지었다. 당시 건축비가 평당 평균 4만원인데, 고작 1만8000원에 지었다. 시공 업체는 하청 업체에 커미션을 받은 뒤 잠적하고, 하청 업체는 서울시가 공급한 철근과 시멘트를 빼돌렸다. 그 일부는 경찰서장이 소유한 근처 목욕탕을 짓는 데로 흘러갔다. 공사 감독자들이 뇌물을 먹은 것은 물론이다.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시민아파트 건물이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야간 구조 작업 모습. /조선일보 DB
1970년 4월 8일 서울 마포구 창전동에 있는 와우시민아파트 건물이 붕괴되어 33명이 사망하고 39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진은 붕괴된 아파트 주민들. /조선일보 DB

사고 직후 군 출신의 김현옥 서울시장이 사퇴했다. 그의 별명은 불도저였다. 강변북로와 세운상가, 여의도 윤중제, 북악스카이웨이, 남산 1·2호 터널, 서울역 고가도로 등을 4년 만에 다 완성했다. 와우아파트는, 3년간 아파트 10만호를 짓는다는 큰 계획의 일부였다. 그는 아주 먼 미래만 바라보며 모든 불가능을 불도저로 밀었다.

그 시절 정반대의 인물도 있었다. 산업은행 출신의 서진수 한국은행 총재는 별명이 ‘먼로주의’였다. 한은을 존재감 없이 고립된 조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와우아파트 사고가 나던 즈음 우량 기업에는 일정 금액을 자동 대출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정치권이 미리 언질을 준 업체에는 대출 심사를 생략토록 한 것이다. 그는 신사적이며 겸손했지만, 힘센 사람과 부딪치는 것은 피했다. 자기 목소리를 죽이고 요구받은 일을 군말 없이 따랐다. 코앞만 바라봤으니 재임 중의 업적은 찾기 힘들다.

김현옥과 서진수는 보는 것과 일하는 방식이 달랐어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다. T. S. 엘리엇은 시간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의 시간과 미래의 시간/ 있을 수 있었던 일과 있었던 일은/ 한끝으로 모이고/그 끝은 언제나 현재이니라”(시 ‘번트 노턴’). 현재에 충실하지 않으면, 미래에 충실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