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초상화의 나라’였다. 제사 때문인 듯하다. 지위가 높을수록 제사를 위해 자신이나 부모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부모의 초상화를 그릴 땐 털오라기 하나라도 닮아야 한다”고 했다. 실물을 미화한 중국이나 유럽과 달리 조선 초상화는 신분 고하와 상관없이 보이는 대로 그렸다. 극사실주의에 가깝다고 한다. 걸작이라는 심환지 초상화, 윤두서 자화상이 전형이다. 노인 반점, 곰보 자국까지 생생한 초상화도 있다.

▶왕을 그린 ‘어진(御眞)’은 조선 초상화의 최고봉이다. 당대 최고 화가들이 전력을 다해 그렸다. 조선은 역대 모든 왕의 어진을 그려 보관했다. 온전했다면 최고 국보가 됐을 것이다. 불행히도 6·25전쟁 직후 부산 임시 보관소에 불이 나 거의 다 타버렸다. 영조 어진과 반쪽이 사라진 철종 어진, 전주 경기전에 별도 보관돼 있던 태조 어진만 겨우 전한다. 이 어진의 세밀한 묘사를 보면 왕 초상화도 사실주의에서 예외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한국의 화폐엔 5명이 그려져 있다. 모두 조선시대 인물인데도 실물 초상화가 전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가상으로 그린 정부 공인 ‘표준 영정’을 사용한다. 위대한 측면을 부각하는 그림이기에 이상형 같은 모습들이다. 조선의 사실주의 초상화와 달리 이 영정들은 다 비슷비슷한 얼굴이다.

▶100원 동전의 이순신 영정은 원래 논란이 많았다. 불패의 무장인데 영정 모습은 선비에 가깝기 때문이다. 유성룡은 이순신에 대해 “단아하고 수양하는 선비와 같았다”고 했다. 반면 “후덕하지 않고 입술이 치올라서 복장(福將)이 아니다”라는 기록도 있다. 유성룡의 기록이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연구자도 있다. 혹평에 따라 위인을 그릴 수는 없지만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비판이 있다. 그래도 많은 국민에게 이 영정은 이순신의 본모습처럼 각인돼 있다. 오래 걸려 형성된 이미지라면 그것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영정을 그린 동양화가 월전(月田) 장우성의 후손이 이순신 영정 반환과 저작권료를 요구하는 소송을 몇 년 전 냈다고 한다. 문재인 정권이 월전이 친일 화가라며 화폐 교체를 추진하자 “아버지가 매도되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며 반발한 것이다. 5000원권과 1만원권, 5만원권에도 같은 논란이 있다. 이들을 교체하려면 4000억원 이상 든다고 한다. 화폐 속 위인의 적합성이나 영정의 사실성을 문제 삼는 것도 아니다. 위인을 그린 화가의 100년 전 행적을 들춰내 화폐 대부분을 바꾸겠다는 나라가 또 있을까. 문재인 시대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