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월가에서 ‘채권왕’으로 불린 빌 그로스는 명실공히 미국 채권시장의 개척자였다. 그가 만든 ‘토털 리턴 펀드’는 20년 넘게 연평균 7.8% 수익률을 올리며 300조원 넘는 규모의 세계 최대 채권 펀드로 등극했다. 이 ‘채권왕’도 말년 실적은 부진했다. 2014년 새로 펀드를 만들었는데 4년간 평균 수익률이 1%도 안 됐다. 결국 채권 운용 47년 만에 불명예 은퇴했다.

/일러스트=박상훈

▶우리 주변에 ‘OO왕’으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다. ‘채권왕’ ‘주식왕’ ‘판매왕’ ‘보험왕’ ‘저축왕’ 등 자신의 노력으로 최고의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 찬사로 붙여주는 별칭이다. ‘자동차 판매왕’으로 손꼽히는 기아 박광주 영업이사는 1994년부터 영업을 시작해 작년에 누적 자동차 판매 대수가 1만3507대로, ‘전설의 세일즈맨’으로 불리는 미국 자동차 판매왕 조 지라드의 누적 판매(1만3001대)도 넘어섰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아침 일찍 출근하는 부지런함으로 무장한 그는 올해도 질주를 계속해 28일 현재까지 누적 판매 대수가 1만4263대다. 작년에 630대 팔았고, 올해는 더 많은 756대를 팔았다. 하루 2대씩 자동차를 파는 놀라운 ‘판매왕’이다.

▶신분이 세습되는 왕과 달리, 이런 ‘OO왕’은 오르기도 힘들고 지키기도 어렵다. 각고의 노력을 부단히 기울여야 하고 남들로부터 인정도 받아야 한다. 진짜가 아닌 ‘사기 왕’도 허다하다. 몇 년 전 한 보험사 에이스로 꼽히던 ‘보험왕’이 줄고소를 당했다. 보험왕 타이틀을 유지할 욕심으로 “3년 안에 원금을 2배로 돌려주겠다”고 무리하게 주위에서 돈을 빌려 보험 실적을 유지하다 들통났다.

▶고액 기부자 모임인 ‘아너 소사이어티’에 대학생 신분으로 최초 가입한 20대 청년 박모씨는 ‘400억 주식왕’으로 불렸다. “중학교 때 주식투자를 시작해 400억원대 자산가가 됐다”면서 실제 18억원가량 기부도 해 유명해졌다. 알고 보니 선행을 베푸는 주식왕으로 자신을 미화한 뒤, 돈 불려 주겠다고 수십억원을 투자받아서 일부는 기부하고 나머지는 가로챘다.

▶지난 10월 ‘40대 빌라왕’의 사망을 계기로 드러나기 시작한 전국 빌라왕들의 전세 사기 행각은 짝퉁 ‘보험왕’ ‘주식왕’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조직적 사기 행각이다. ‘깡통 전세’를 수백채, 수천채씩 굴린 것도 황당한 데다, 빌라 사기에 연루된 사망자만 벌써 3명째다. 전세 사기를 낱낱이 수사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사기를 가능케 하는 법적·제도적 허점을 보완하는 것도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