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동구권에서 사업하던 한인 교포가 카자흐스탄의 거래처를 방문했다. 정성 들여 준비한 선물을 내놨는데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유를 물었더니 “다음에 올 때는 커피믹스를 부탁한다”고 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커피”라는 거였다. 작가이기도 한 그가 엊그제 SNS에 소개한 경험담이다. 커피를 자본주의 퇴폐 문화의 상징으로 배격하는 북한도 뒤로는 커피를 즐긴다. 특히 커피믹스는 외교관이나 외화벌이 일꾼 귀국 가방에 들어가는 필수품이다. 고위층에 바치는 선물 목록에도 들어 있다.

/일러스트=박상훈

▶커피믹스의 원조 격인 인스턴트 커피는 미국 남북전쟁 당시 북군이 술 대신 지급하기 시작한 보급품에서 비롯됐다. 처음엔 액상 커피에 연유를 섞어 응고시켰다. 1차 대전 이후 열건조 커피와 냉동동결 제품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막대형 봉지에 커피·크림·설탕을 넣을 생각은 못했다. 그 아이디어를 낸 주인공이 한국의 동서식품이었다. 1976년부터 개발에 들어가 1980년 첫선을 보였다. 1993년엔 기호에 따라 설탕 분량을 조절할 수 있는 제품을 선보였다. 2017년 통계청 조사에서 ‘한국을 빛낸 발명품 10선’ 중 5위에 올랐다. 커피믹스의 성공을 본 글로벌 식품기업 네슬레도 모방 제품으로 시장에 뛰어들었다.

▶히트상품의 특징 중 하나가 생산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소비되는 것이다. 한때 수험생들 사이에 ‘붕붕 드링크’라는 카페인 음료 제조법이 성행했다. 박카스·원비디·레모나를 섞어 마시면 온몸이 날아갈 것 같은 활력을 느낀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그래도 잠이 쏟아지면 커피믹스를 추가했다. ‘붕붕드링크 하이퍼 포션’이라 한다. 몸에 좋을 수는 없지만 워낙 널리 소비되다 보니 나타난 활용법이다.

▶또 다른 효용 가치가 추가됐다. 경북 봉화의 광산 매몰 사고에서 9일 만에 극적으로 구조된 이들이 “커피믹스를 밥처럼 먹으며 버텼다”고 했다. 커피믹스 대표상품인 ‘맥심 모카골드 마일드’ 1개 열량이 50㎉다. 탄수화물 9g 중 당류 6g, 포화지방 1.6g 등이 들어 있다. 다른 회사들 제품도 비슷하다. 성인 남성의 하루 칼로리 섭취량 2000㎉엔 크게 못 미치지만 위급 상황에서 목숨을 지켜준 훌륭한 비상식량이었다.

▶재난 전문가들은 비상식량의 조건으로 ‘조리하지 않고 먹을 수 있고’ ‘포만감 없어도 높은 열량을 지녀야 하며’ ‘장기 보관이 가능하고’ ‘휴대가 편리하도록 부피가 작고 가벼워야 한다’는 점을 꼽는다. 건빵이나 미군 전투식량인 MRE가 해당한다. 여기에 한국인이 만든 커피믹스도 포함돼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