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는 ‘국가에 대한 일격’이란 뜻의 프랑스어다. 군대가 정권을 탈취해 계엄령 선포, 의회 기능 정지, 언론 장악 등의 조치를 취한다. 프랑스식 명칭이 붙은 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1799년, 조카 루이 나폴레옹이 1851년 일으킨 정변을 전형적 사례로 보기 때문이다. 전자는 근대 프랑스의 기틀 확립, 영토 확장으로 이어졌지만 후자는 극도의 혼란과 유혈 사태를 남겼다.

윤석열 대통령이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43주기를 하루 앞둔 25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을 찾아 박 전 대통령 묘소를 참배하고 있다./뉴스1

▶누가 어떤 철학을 갖고 추진하느냐에 따라 쿠데타의 결과는 크게 엇갈렸다. 이집트 육군 중령 나세르가 이끄는 자유장교단은 1952년 왕정을 폐지하고 토지 개혁과 수에즈 운하 국유화 등을 밀어붙였다. 이집트는 범아랍주의, 아랍사회주의를 표방하며 한동안 아랍의 맹주로 군림했다. 신생 독립국들에 귀감이 됐다. 리비아에서 쿠데타를 일으킨 카다피는 42년 폭정과 반미 노선으로 리비아의 인권과 경제를 최악에 빠뜨렸다. 2011년 ‘아랍의 봄’ 때 시민들에게 붙잡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종필은 생전에 “나세르의 이집트 혁명이 5·16의 모델이었다”고 했다. 박정희도 독재를 했지만 외자 도입, 수출 입국, 전자·중화학 육성, 농촌 혁명에 사활을 걸었다. 외자 한 푼을 벌겠다고 독일로 간 우리 광부들 앞에서 “우리는 못살아도 후손에게는 잘사는 나라를 물려주자”고 말하다 울음을 터뜨린 것이 그의 진심이었다. 세계 최빈국이자 수천 년 농업 국가였던 한국은 GDP 10위권, 무역 6위의 선진 공업국으로 탈바꿈했다. 2차 대전 이후 독립한 나라 중 선진국이 된 나라는 우리뿐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원조 주는 나라가 된 것도 우리뿐이다. 이를 기적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기적이라는 말 뜻을 바꿔야 한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와 인권 탄압은 오점으로 남았다. 그렇다고 매년 봄 국민이 굶어 죽던 나라를 최첨단 산업국가로 변모시킨 그의 비전과 의지를 폄훼할 순 없다. 썩고 지리멸렬한 나라, 국민이 패배 의식과 자기 비하에 찌든 나라에 일격을 가해 국민을 흔들어 깨웠다.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앞장섰다.

▶어제가 박정희 대통령 서거 43주기였다. 윤석열 대통령이 그 전날 서울 동작동 현충원 묘역을 참배했다. 가족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제외하고 현직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 서거 일에 즈음해 묘소를 찾은 사례는 노태우 대통령 시절 한 차례를 빼면 없다고 한다. 박정희가 없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현직 대통령이 박정희를 추모한 것이 뉴스가 되는 일 자체가 이상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