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본 오사카 파친코에서 일하는 재일 교포 소설가 집에 초대받은 적이 있다. 바쁜 일 하며 소설까지 쓰는 이유를 들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파친코는 일본에서 존중받는 직업이 아니다. 자존감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소설가는 존중받는다”고 했다. 이민진 소설 ‘파친코’에 비슷한 대목이 있다. 자식을 둔 일본인 이혼녀가 파친코를 운영하는 한인과 재혼하려 하자 어머니가 말린다. “조선인과? 파친코 하는 사람과? 불쌍한 자식들에게 못할 짓을 할 만큼 하지 않았니?”

▶'파친코 하는 한인’은 냉대와 멸시를 견디며 산다. 천한 직업이란 인식 때문에 일본인은 기피하던 것을, 일제 패망 후 마땅한 일자리 없던 재일 한인들이 생계를 위해 택했다. 일본 파친코 업계의 80%를 재일교포와 그 후손이 운영하며 ‘파친코=재일 한인’ 인식이 굳어졌다. 혐한 성향의 일본인들은 ‘조선 도박’이니 ‘조선 구슬넣기’니 하며 손가락질했다.

▶일본인들 태도는 이중적이다. 파친코는 회사원들이 퇴근길에 들러 즐기는 대표적 게임이다. 전성기 땐 연간 3000만명이 출입했다. 파친코 업소 순례 유튜브도 인기다. 100만명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곳도 있다. 스마트폰 앱이나 잡지, 게임을 보여주는 TV 프로도 있으니 일본의 국민 오락이다. 그런데 정작 업소를 운영하는 한인들을 내려다본다.

▶많은 재일 교포에게 삶의 터전인 파친코 산업이 쪼그라들고 있다는 소식이 엊그제 본지에 보도됐다. 1990년대 초만 해도 2만 곳 넘던 전국 점포 수가 지난해 8000개까지 줄었다. 여러 이유가 거론된다. 당국이 파친코의 사행성을 낮춰 대박 기회를 차단한 데다 코로나까지 겹치며 찾는 발길이 줄었다. 그러나 크게 보면, 전철과 버스에서 온갖 스마트폰 게임을 내려받아 즐기는 시대다. 파친코 시대는 저물고 있다.

▶소설 ‘파친코’는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한인의 개미지옥’으로 파친코를 그린다. 명문 와세다 졸업생도, 미국에 유학 가 금융인이 되어 돌아온 이도 다른 삶을 꿈꿨지만 종착지는 파친코였다. 일본이 지금도 그런 사회라면 파친코의 쇠락은 재일 한인에게 재앙일 것이다. 현실에선 다른 신화가 생겨나고 있다.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의 아버지는 파친코로 돈 벌어 아들을 미국에 유학 보내 세계적 사업가로 키웠다. 한인은 세계 어디서든 그 나라 평균 국민 이상의 삶을 산다고 한다. 그 억척 DNA가 파친코 쇠락 시기를 맞은 재일 교포들에게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힘이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