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독자에게서 메일을 받았다. 얼마 전 아프리카 수단에 대한 기사에서 피난민이라는 단어를 썼는데, 해당 맥락에서는 ‘피난민’이 아닌 ‘피란민’이 맞다는 지적이었다. 부끄럽지만 지금껏 두 단어가 동의어라고 생각했던 탓에 당황한 마음으로 표준국어대사전을 열었다. 사전에 따르면 피난민은 ‘재난을 피하여 가는 백성’, 피란민은 ‘난리를 피하여 가는 백성’이었다. 홍수 등 자연재해로부터 몸을 피했다면 피난민, 전쟁 등으로 인해 피신했다면 피란민인 셈이다.

최근 극심한 혼란을 겪고 있는 두 나라를 취재했다. 동아프리카 수단과 남미 아이티가 그 주인공이다. 수단에선 지난해부터 압델 파타흐 알부르한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SAF)과 모하메드 함단 다갈로 장군의 신속지원군(RSF) 간 내전이 이어지고 있다. 두 세력은 2019년 함께 쿠데타를 일으켜 30년간 집권한 독재자 오마르 알바시르 전 대통령을 축출했다. 하지만 ‘힘의 공백’ 뒤에 찾아온 건 혼란이었다. 이들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고, 850만명 이상이 피란에 나섰다.

아이티 사정도 만만찮다. 2010년에 발생한 대지진으로 한국에도 익숙한 아이티는 현재 갱단이 지배하는 나라가 됐다. 2021년 7월 조브넬 모이즈 당시 대통령이 괴한들에게 피살된 뒤 국정은 마비 상태로 빠져들었다. 이후 갱단들이 교도소를 습격해 죄수 4000여 명을 탈출시키는 등 사실상 정부를 장악하면서 나라가 무법천지가 됐다. 어렵게 연락이 닿은 현지 교민들은 전화 통화에서 “밤마다 총소리가 들리는 게 일상이 됐다”고 전했다.

흔히 난민이라고 불리는 이들도 피란민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남부 도시 라파에만 피란민이 140만명 있고, 600만명 이상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전란을 피해 국경을 넘었다. 몇 해 전 한국에 온 예멘과 아프가니스탄 난민들도 마찬가지다. 그 밖에도 수많은 나라에서 어떤 ‘난리’가 벌어지고 있는지 일일이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우려스러운 점은 기후 위기로 인한 피난민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최근 최악의 홍수가 발생한 브라질과 러시아, 두바이 기사를 보면서 기시감이 들었다. 국제부에 온 뒤로 이상 기후로 인한 홍수·폭염·가뭄에 대한 기사를 수도 없이 썼기 때문이다. 내부이재민모니터링센터(IDMC)에 따르면 재작년에만 3260만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글로벌 싱크탱크 경제평화연구소는 최악의 경우 2050년까지 전 세계 인구 12억명이 ‘기후 난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집을 떠나 지구촌을 떠도는 피란민과 피난민. 이제는 지구 반대편에서 각종 공습이나 재해 소식이 들려올 때마다 지친 얼굴로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이들이 먼저 떠오른다. 당신도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결코 먼 나라만의 일도, 남의 일만도 아니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