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엔비디아는 실리콘밸리 데니스(미국의 저렴한 레스토랑 체인)에서 탄생했습니다. 4시간 동안 커피 10잔을 시켜놓고 작업을 하다 보니 나중엔 식당 뒤편의 방으로 쫓겨났죠(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인공지능(AI) 반도체로 쓰이는 GPU(그래픽처리장치)를 만드는 미국의 엔비디아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팹리스’다. 챗GPT와 같은 AI의 90%가 엔비디아 반도체로 구동된다. 생산은 대만 TSMC에 맡기고 공장 없이(fab less·팹리스) 반도체 설계에만 집중하는데도, 기업가치(시가총액)가 1조달러를 넘어 테슬라를 제치고 세계 6위다. 이런 엔비디아도 시작은 1993년 젠슨 황을 포함한 가난한 엔지니어 셋의 스타트업이었다.

팹리스는 꿈에 베팅하는 회사다. 공장 설비가 없고, 반도체를 설계할 컴퓨터 몇 대와 테스트 장비뿐이다. 차세대 반도체에 도전하는 팹리스는 구체적인 시장도 없다. 젠슨 황은 이를 ‘0조원짜리 시장’이라고 불렀다. 엔비디아가 3차원 게임 그래픽용 GPU 개발을 시작한 1993년은 게임의 태동기였고, GPU를 AI 개발에도 쓸 수 있게 한 소프트웨어(쿠다)를 공개한 2006년은 알파고(바둑 AI)와 이세돌의 대국보다 10년을 앞선 시점이다.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던 산업에서 기회를 엿본 이들이 있었고, 엔비디아는 두 번의 부도 위기를 겪었지만, 이 꿈에 수백억원을 지원한 미국 투자자들 덕분에 생존했다.

작년 말 들렀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팹리스 스타트업 ‘세미다이내믹스’도 ‘유럽의 엔비디아’에 도전하는 회사다. 박사급 인력 24명이 포진한 이곳은 2026년 유럽 자체 설계 GPU를 내놓기로 했다. 유럽은 권역 내 30개 반도체·전자기업 연합체를 구성해 자체 GPU 개발을 목표로 삼고, 그중 한 곳인 세미다이내믹스에 200억원을 지원했다. 루제 에스파사 CEO는 “자율주행차를 만들어도 자율주행 반도체를 만들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며 “20년은 뒤처졌지만, 반드시 우리 기술로 GPU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도 AI 반도체, 바이오센서 반도체 등 미래 시장에 도전하는 팹리스들이 있다. 하지만 이 꿈에 베팅해주는 조력자가 거의 없다. 한 팹리스 회사 대표는 “매출 0원, 적자에, 생산 설비 없고, 설계 인력이 회사 자산의 전부인 팹리스가 한국에서 투자와 대출을 끌어오기는 하늘의 별따기”라고 말했다. 반도체 위탁생산을 맡기려면 수십억~수백억원 선금을 지급해야 하는데, 당장 이 돈이 부족한 기업도 태반이다. 한국 팹리스 스타트업은 약 150곳, 70조원 규모 국가반도체펀드를 운영하는 중국 팹리스는 3800곳에 달한다.

미국·유럽·일본·중국 등 주요국이 편성한 반도체 산업 지원 보조금이 현재까지 발표된 것만 385조원을 넘는다. 수십조원이 팹리스 기업에 흘러들어 갈 것이다. 한국은 국가 보조금·반도체펀드도 없고, 미국처럼 자본시장이 크지도 않다. 한국 팹리스가 ‘0조원짜리 시장’에 도전하는 것을 마음으로 응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