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어쭙잖긴 하나 여러 권의 책들을 펴냈다. 존경하는 어른들, 학문의 빚을 진 선배들, 직장 동료들, 제자들…. 한번 책을 내면, 증정해야 할 대상들이 많았다. 인세 조로 받는 부수로는 턱없이 모자라, 출판사에서 직접 구입한 책들도 부지기수다. 곱게 헌사를 써서 부치기도 하고 직접 건네는 작업들 모두 고달프지만 가슴 뛰는 일이었다.

책 욕심이 ‘땅처럼 두꺼워’ 지방의 유명 중고 서점들을 순례하거나 고서 소장자들을 방문하던 일도 비일비재. 얼마 전까진 인터넷상의 경매들에 간간이 참여하기도 했다. 그런 과정에서 못 볼 광경을 목도했다. 정성스레 헌사를 써서 선배에게 드린 책, 아끼던 제자에게 건넨 책 등이 가끔 내 눈에 포착되었던 것. ‘내 헌사가 시퍼렇게 살아있는 책이야 버려질 리 없다’는 믿음이 무너지는 순간들이었다. 야속함과 창피함으로 며칠 밤을 뒤척이곤 했다. 그런데 대체 그 책들은 어떻게 중고 서적상의 손에 들어갔을까.

책이 범람하는 시대, 책이 짐인 세상이다. 이사를 해 보면 책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된다. 한 몸 건사하기에도 비좁은 아파트. 쓰레기장엔 날마다 우수수 책들이 버려진다. 저자 증정본들이 비싸게 팔린다니, 그들은 중고 서점의 이문(利文)을 위해 저자의 헌사가 적힌 페이지를 그나마 찢지 않고 버리는 선행(?)을 실천하는 걸까. 급기야 어엿한 대학들이 도서관에 소장 중인 책들을 무더기로 폐기 처분하는 ‘반문명 시대’가 도래했다. 개인이 갖고 있는 책들을 버리는 일쯤이야 무슨 대수랴.

사람들은 책을 읽지 않고, 버려질 줄 알면서도 강호의 저자들은 끊임없이 책을 쓴다. 사이버 공간에 명멸하는 지식의 검불들을 몇 올 건져내곤 책을 읽었다고 떠벌리는 허풍선이들이 행세하는 세상이다. 그런 현실에서 자신의 책만 소중히 보관되길 바라는 건 과욕이다. AI 로봇이 등장해 논문 작성까지 도와준다는 요즈음이니, 활자로 쓰인 종이책만 읽으라고 강요하는 풍토의 종말도 눈에 보듯 선하다. 따라서 책을 낸 뒤 책을 주고 싶은 대상에게 ‘당신에게 내 책을 한 권 줘도 되겠소?’라고 정중하게 물어야 하는 분위기의 생소함마저 머지않아 익숙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