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를 여러 권 냈다. 책 하나를 옮기는 데 여러 달이 걸리는 만큼, 그리고 많은 경우 역서는 큰 업적으로 간주되지도 않는 만큼, 책이 되지도 못할지 모를 남의 책을 옮기는 것은 어찌 보면 무모한 짓이다. 여전히 내 저장장치 한 구석에는 번역을 완성하고서도 아직 내지 못한 책이 이 무모함을 증언하며 여러 권 잠들어 있다.

하지만, 재밌는 것 그리고 되돌아보면 의미가 있는 일들은 이렇게 무모한 짓에서 나오는 법이다. 이 낯선 외국어, 문화적 의미까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외국어 단어와 문장을 한국에서 쓰이는 단어와 한국어 문장으로 옮길 때, 나는 이 언어가 동전의 양면처럼 품고 있는 한계와 힘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작년에 냈던 역서에서 썼던 단어 하나가 떠오른다. 영어 책에서 독일어 단어의 용례를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하는 부분이었다. 설명까지는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영어권의 신조 단어 ‘seeky’를 어떻게 번역할지가 고민이었다. 일종의 속어여서 어학 사전에도 없었다. 문장에서 ‘무언가에 심각하게 빠져 좋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무언가를 놓지 못하는 상태’라는 의미는 알겠는데, 마땅한 한국어 단어가 없었다. 이 단어에 가로막혀 번역도 진도를 나갈 수 없었다. 전체 번역문을 만들어 두고 문제의 단어가 들어갈 자리를 빈 칸으로 둔 채 며칠을 고민했다.

출퇴근길마다 앉을 자리를 찾아 노트북을 펴놓고 이 문장만 쳐다보던 어느 날, 나는 내가 놓인 상황이 곧 이 단어와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경인선에서 환승해 집으로 들어가는 러시아워 시내버스의 구석 자리에 겨우 앉아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는 내가, 말하자면 찌들어 있는 상태라는 생각이 들었고, seeky를 ‘찌들다’라고 옮기면 좋겠다는 데 생각이 이르렀다. ‘외국 석유에 찌들어’, 자동차에 의존하는 삶을 바꾸지 못하는 미국인들을 말하는 문장이 혼잡한 대중교통 출퇴근에 찌들어 있는 한국인의 머릿속에서 나왔다는 것이 역설적이었지만, 이렇게 하니 틀만 잡혀 있던 문장들이 자못 멋진 문장으로 완성되어 나왔다.

살아있는 생물처럼 계속해서 변화하는 언어와 사람들의 삶을 한국어가 모두 담을 수 없다는 것은 분명 한계다. 하지만 제한된 통사 구조와 어휘라는 조건 속에서도 우리 언어 바깥에 있던 의미를 어떻게든 포착해 낼 수 있다는 것은 한국어의 힘이기도 하다. 이 한계와 힘 사이에서, 한국어 공동체에 주어진 표현의 공간을 조금씩 넓혀 나가는 재미가 내게는 번역을 계속하게 만드는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