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들 밥 좀 줘라. 워터게이트 이후 세상을 가장 떠들썩하게 만든 게이트는 #스웨덴게이트다. 스웨덴 사람들은 집을 방문한 아이에게 밥도 주지 않는다는 경험담이 미국 소셜미디어에 올라오며 시작된 논쟁은 빠르게 세계로 퍼졌다. 경제적으로 풍족하지 못해도 손님 접대에는 진심인 국가 사람들이 분노를 토했다. 어떤 스웨덴 사람은 그런 풍습이 1990년대까지만 있었다고 항변했다. 어떤 스웨덴 사람은 자국에 과도한 개인주의가 있는 건 사실이라고 했다.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이 소동은 농담 형식으로 인터넷을 떠돌며 영원히 스웨덴 사람들을 괴롭힐 것이다.

스웨덴은 롤모델이었다. 스웨덴식 복지국가는 한 국가가 최종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이상적 모델로 여겨졌다. 팬데믹 한가운데서 스웨덴은 자유방임형 방역을 선택했다. 장렬히 실패했다. 사망자는 이웃 노르웨이의 9배에 달했다. 노인과 의료 복지 바깥에 있는 이민자 희생이 많았다. 자율을 강조한 코로나 정책과 스웨덴게이트에는 공통점이 있다. 압도적 개인주의 사회만이 도달할 수 있는 특징이라는 것이다. 손님에게 라면이라도 먹여 보내야 하는 우리가 흉내 낼 수 있는 건 아니다.

팬데믹은 우리가 서구에 갖고 있던 오랜 환상을 무너뜨렸다. 유럽과 미국은 한국 위치 추적 방역을 시민 권리 통제라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사람을 더 살렸다. 그러니 고개를 돌려 중국몽을 꿀 것인가? 시민 권리를 철저하게 박탈하는 그 동네 봉쇄 정책은 북한과 다를 게 없다. 누구도 본보기가 될 수 없는 시대라면 타국의 경험을 본받으며 성장한 한국의 미래는 어디에? 쿠오바디스 도미네!

얼마 전 태국 정부는 대마 합법화를 발효했다. 동성 결합에 이성 결혼과 비슷한 법적 권리를 부여하는 법안도 의결했다. 놀랍도록 진보적이다. 동시에 태국은 초법적 왕권과 군부 권력이 살아있는 국가다. 세계는 더 이상 선진국과 후진국을 통계로 나눌 수 없는 각개전투 시대를 맞이한 것 같다. 다만 나는 ‘한국이 세계의 롤모델’이라는 주장을 볼 때마다 약간의 냉소로 ‘국뽕’을 다스리며 김애란 소설 ‘서른’의 대사를 중얼거리곤 한다. “너는 자라 내가 되겠지. 겨우 내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