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백하건대 달리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심장과 종아리가 쥐어짜이는 그 느낌에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혼자 달리기도 지루한데 서울 와선 달릴 장소까지 마뜩잖았다. 건강해지려면 근력 운동 말고 유산소도 병행해야 하기에 억지로 뛰다시피 했다.

그랬던 내가 6만원이란 참가비까지 내가면서 뛰게 됐다. 거창한 이유는 아니었고 친구가 조선일보에서 서울하프마라톤을 주최한다고 알려줘서 덜컥 신청했다. 10km 코스나 하프 코스나 참가 비용은 똑같길래 이참에 하프 코스를 뛰어보기로 했다. 막상 입금해놓고 계속 후회했다. 새벽녘부터 일어나 지하철 타고 광화문까지 가야 하는 게 불합리하게만 느껴졌다. 오전 5시 30분 알람에 잠을 깼을 때 이불 속에서 갈까 말까 한참 고민했다. 일요일 이른 오전부터 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었는데 착각이었다. 광화문 지하철역은 새벽 갓밝이부터 인파로 가득했다. 화장실 한번 쓰는 데 20분 동안 줄을 서야 할 지경이었다. 가득한 인파를 뚫어내며 출발선까지 가는 동안 사방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가 먹먹했다.

곧 폭약 소리가 터지면서 하프 C그룹의 달리기가 시작됐다. 수천 인간 파도가 일제히 앞으로 달려 나갔다. 시작 후 10분 동안 속도 올리고픈 충동을 억누르는 일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분명 내 뒤에 달리는 이들도 있을 텐데 괜히 앞에 한가득한 사람들만 보며 초조해졌다. 많은 사람과 좁은 길목 탓에 이따금 내 어깨를 치며 추월하는 이도 있었다. 그때마다 일찍 치고 나가봐야 좋을 게 없는 걸 알면서도 몸이 달았다.

불편함을 꾹 참으며 5km를 달리자 마침내 길이 트였다. 여의도와 이어진 넓은 마포대교 너머 마천루의 유리창이 햇빛에 번들댔다. 장엄한 풍경 앞에 나도 모르게 발이 빨라졌다. 킬로미터당 페이스가 단숨에 20초나 줄었지만 전혀 지치지 않았다. 오히려 몸은 한껏 가벼워지고 어깨가 마구 들썩였다. 산만하던 정신은 또렷해져서 눈앞의 길과 사람밖에 보이지 않았다. 러너스 하이. 신체를 극한의 고통까지 몰아넣을 때 분비되는 엔도르핀에 감정이 고양되는 상태에 들어갔다. 달리기 중독자들은 이 쾌감을 못 잊어서 무릎 연골 나가도록 뛴다던데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대로 평균 속도가 점차 줄어들다가 마침내 위기가 찾아왔다. 들숨 날숨이 차츰 잦아짐을 느꼈다. 이제껏 적당히 이자만 갚아 온 산소 부채의 원금까지 갚아야 할 시기가 온 듯했다. 앞뒤로 흔들리던 두 어깨와 양다리도 쑤시고 저려 왔다. 골인 지점까지 4km밖에 안 남은 시점이었다. 터덜터덜 걷는 사람들 모습이 기하급수로 늘어났다. 날 추월하는 사람보다 내가 추월하는 사람이 월등히 많아지고 있었다. 만사가 그렇듯 하프 마라톤도 마무리 20분이 고비. 그저 고통을 견뎌내며 우악스럽게 골인 지점과 가까워지는 일만 생각해야 했다.

인고의 시간이 지나 마침내 결승점을 눈앞에 뒀다. 전속력을 내보려 했지만 다리 힘이 못 따라가서 우스꽝스러운 팔자 뜀으로 트랙을 밟았다. 공원 벤치에 엎어져 숨을 고르고 있자 휴대폰으로 집계된 기록이 도착했다. 전체 순위 1480위, 100명 중 얼추 25등에서 30등 수준의 기록. 내 나름대로 잘 달린다고 자부했는데 현실을 알자 단숨에 겸손해졌다. 그동안 마라톤을 인생에 갖다 대는 식상한 비유가 싫었는데, 이렇게 많은 인파와 달려보니 알겠다. 정말 삶의 축소판이 맞는다. 조급해하지 않아야 했고,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했으며, 결과 앞에서 겸손해야 하는 이 흐름, 이게 인생 아니면 무엇이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