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이철원

정치와 결합한 죽음은 재화로서 가치를 지닌다. 대량생산에 따른 공급 과잉이 시장 확대를 위한 전쟁으로 해소됐듯, 대형 참사로 벌어진 집단적 죽음이 의석 확대를 위한 정쟁으로 해소되는 것이다. 이 땅의 죽음은 더 이상 거룩하지 않다.

이제 죽음은 소비재로서 포장되고 유통되며 진열되고 있다. 본질을 겹겹이 둘러싼 채 그 부피만 키워가는 것은 대체로 진실이라는 이름의 포장지다. 단 하나의 죽음도, 백쉰아홉의 죽음도 진실은 결국 하나다. 그러나 백쉰아홉의 죽음은 마치 백쉰아홉의 진실을 요구하는 듯 끊임없이 탈피를 거듭하며 죽음을 영원한 동면 안에 가둔다. 귀천해야 할 죽음이 진실에 갇혀 울고 있다. 그 눈물을 대신 흘려주는 건 웃고 있는 산 자다.

유통 과정을 주도하는 건 정치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지성인 집단이다. 이 사회가 그동안 쏟아낸 숱한 죽음 앞에 무관심했던 그들이 한날한시에 벌어진 대형 참사로 마치 성찰이라도 한 듯, 말과 글을 놀려 애도를 갈구하고 처벌을 촉구하는 모양새는 제법 비장해 보인다. 그러나 국가의 개입과 방임이 아닌 내재적 한계에서 비롯된 죽음은 그 구성원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 그들은 그 책임에서 벗어나려 ‘예견된 참사’ 같은 공허한 말을 늘어놓고, 사망자를 ‘희생자’로 치환하는 기지를 발휘해 핏빛 대지 위로 선명한 그들의 고귀한 발자국을 지워내려 애쓴다. 그렇게 죽음은 대통령과 집권 여당의 책임으로 완성돼 진열대에 오른다.

진열된 죽음들 앞에, 열성적으로 호객 행위에 임하는 정치인의 모습은 광인에 가깝다. 비대한 몸뚱이를 고급 양복으로 감싼 그는 한 손에는 성경과 목탁과 묵주를 동시에 들고,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주판을 거머쥔 꼴이다. 손목엔 ‘혁명가가 사랑한 자본주의의 상징−롤렉스’가 반짝이는데, 특이한 점은 구두는 낡고 해져 볼품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율하는 감동으로 증오와 애도를 외치고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죽음은 소비될 것이다. 최종 소비자는 대중이다. 고결한 대중은 언제나 분노를 원한다. 정치는 그 점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거대한 죽음으로 인해 거대한 분노가 물결치고, 거대한 의혹이 발굴되며 거대한 추적과 수사가 진행되는 사이, 산개한 각자의 여린 죽음은 철저히 소외되고 잊히게 된다. 국가의 부재로 어른 손에 죽어간 한 아이, 국가의 온정으로 방면된 살인 전과자의 손에 죽어간 한 여인, 국가의 강제로 군부대에서 죽어간 한 청년, 국가의 방임으로 냉골에서 죽어간 한 노인. 그러나 이러한 죽음은 매대 위에 없다. 정치가 원하는 죽음의 형식은 언제나 박리다매를 위한 복수형일 뿐, 피해자 A씨, 사망자 B씨로 표기되는 단수형 죽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단 하나의 죽음이라 하여 국가의 책임이 없겠는가. 이런 의문과는 무관하게도 나는 죽음의 축제 한복판에 서 있다. 늘어선 죽음들 앞에, 다시 호객 행위에 열중인 정치인 모습이 보인다. 그의 목에 걸린 소형 라디오에서는 흥겨운 트로트 박자로 리믹스한 장송곡이 흘러나오고 있다.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로 반복되는 후렴구가 인상 깊다. 내가 다가서자 그는 내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안다. 너는 위선과 위악에 사로잡혀 영혼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이제 너의 모습을 보라. 너는 인간인가, 짐승인가?”

“인간은 그토록 이중적인 존재입니다. 그 거대한 죽음 앞에서 당신이 기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듯 말입니다.”

나의 대답에 정치인은 긍정도 부정도 없이 황급히 자리를 뜬다. 삼백넷의 죽음이, 아이들의 영혼이, 노란 리본과 함께 그가 떠난 자리에 버려져 흩어지고 있다.

축제 저편에서, 죽음에 책임을 진 자들이 재판대 위로 올려져 꿇어앉아 있다. 삽시간에 몰려든 군중이 그들에게 돌을 던지기 시작한다. 예견된 참사였다면서 예견하는 기사 한번 쓴 적 없는 언론인들이 돌을 던지고, 당일 경찰력 대부분을 차지한 시위꾼들이 돌을 던지고, 설렁탕을 즐겨 먹고 뒷짐을 지고 걷는 노인들도 돌을 던진다.

술에 취해 춤을 추던 군중이 ‘증오와 애도’를 외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이 성난 눈으로 나를 바라봤을 때, 놀랍게도 나는 군중은 언제나 옳고 선하다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인간과 짐승 사이에서, 언제나 그랬듯 나는 인간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저리로 가자. 웃으며 딸아이를 이끄는 나의 손에도 어느새 돌 하나가 쥐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