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소병인 당원병 환자들과 부모들이 29일 춘천마라톤 10㎞ 출발을 앞두고 강윤구(가운뎃줄 왼쪽에서 다섯째) 연세대 원주세브란스 교수와 함께 주먹을 불끈 쥐고 있다. 참가자 송효순 씨가 하늘나라로 간 아들 병찬이가 참가했던 춘천마라톤 출발선에 섰다. 김종녀(왼쪽)씨가 풀코스 출발을 앞두고 시각장애인 남편 박인석씨 등에 업혀 활짝 웃고 있다.(맨 위 사진부터 시계방향) 남강호 오종찬 김지호 기자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는 매년 10월 열리는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때문이다. 산과 나무, 하늘과 호수의 빨갛고 노랗고 새파란 빛깔, 수많은 이들이 한데 모여 뿜어내는 역동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참가자들이 던진 출사표 사연을 읽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참가자들이 터질 듯한 심장과 강철 같은 두 다리로 써 내려간 이야기를 읽으면 내 눈과 귀를 맑은 물로 씻어내는 느낌이다. 겸허하고 진실한 삶의 의지가 모든 이야기 속에 담겨 있다. 이토록 힘든 자신과의 싸움을 별다른 이유나 계기 없이 해나가는 사람은 드물다. 지난 29일 끝난 올해 대회도 2만명 가까운 참가자가 사람 수만큼이나 다양한 이야기를 품고 달렸다. 많은 이가 마라톤 덕분에 암을 극복하고 장애를 이겨냈다고 했다. 병상에 누운 어머니, 동생, 친구를 응원하면서, 세상 떠난 소중한 가족과 이웃을 추억하면서 달리기도 했다.

참가자들이 1인칭으로 쓴 이야기에는 3인칭으로 작성되는 기사가 다 담아내기 어려울 만큼 깊은 고백이 있다. 30일 자 지면에 소개된 참가자들이 대회에 앞서 보내온 글을 읽다가 나는 여러 번 울었다. 2년 전 아들을 잃은 송효순씨에게 마라톤은 사무치는 그리움이었다. 아들이 달렸던 길을 달리며 아들이 보았던 풍경을 보려고 그는 아들이 2019년 뛰었던 춘천마라톤에 올해 참가했다. 아들에게 쓴 편지로 그는 출사표를 대신했다. “병찬아! 아빠가 너를 만나러 가는 그날까지 너는 언제나 아빠의 반쪽이고, 아빠는 병찬이의 반쪽이라는 아빠의 삶의 자세를 너는 기억하거라. 춘천마라톤에서 너와 같은 풍경을 볼 수 있다는 희망으로 기쁘게 온 힘을 다하여 달려보려고 한다. 하늘에서 아빠와 친구들을 응원하면서 기대하거라. 사랑하는 병찬이에게 아빠가.”

갑작스럽게 시력을 잃은 남편과 손잡고 2년 연속 풀코스를 완주한 김종녀씨에겐 마라톤은 감사였다. 그는 ‘감사’와 ‘다행’이란 단어가 여러 번 반복되는 글을 써 대회본부에 보냈다. “시력을 잃은 남편 앞에서 어떻게 이 험난한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나, 그냥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내가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정신 차리고 남편 손잡고 시작한 운동. 만약 내가 달릴 수 없었다면 어떻게 남편을 운동시킬 수 있었을까. 말없이 함께 달려준 남편이 고맙고, 혼자 하기 힘든 운동을 남편과 같이 할 수 있어 든든하고, 늘 함께라서 감사하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준 마라톤에 감사하다.”

체내 혈당을 만드는 효소가 나오지 않는 당원병 환아 8명에겐 이번 대회 10㎞ 참가가 크나큰 도전이었다. 성취 경험과 자신감을 얻는 귀중한 기회가 됐지만, 참가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환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는 강윤구 원주세브란스병원 소아청소년과 교수에 대한 감사였다. “교수님이 개인별 맞춤형 관리와 진료를 해주시면서부터 아이들 건강은 놀라울 정도로 좋아졌고 학교 생활이나 일상에서도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번에 참가하는 한 아이가 엄마한테 말했다고 합니다. ‘당원병과 우리 천사 같은 선생님을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고 환자 마음 하나하나 헤아려 주시는 훌륭한 의사 선생님이 계시다는 걸 세상에 알려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 날개를 달아드리고 싶습니다.”(당원병 환자 아버지 배준호씨)

누구에게나 시련은 닥치지만 꺾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시련에 치열하게 맞서는 이들에게 마라톤은 가장 간절한 삶의 고백, 서로를 향한 가장 애틋한 응원이었다. 춘천마라톤이 ‘가을의 전설’이라 불리는 건, 단풍과 가을 풍경 때문만이 아니었다. 자기 인생으로 각자의 전설을 써내려가는 주인공들이 모여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