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와 과장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동네가 있다. 세상에 없는 기술이나 사업 모델을 팔아서 투자를 받은 뒤, 그 돈으로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이 동네의 불문율이다. 투자금은 수십억원은 기본이고 수백억, 수천억도 흔하다. 성공작은 가뭄에 콩 나듯 나오는데, 실패는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엄청난 돈을 쏟아부은 투자자들은 돈을 날려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동네를 ‘창업과 혁신의 메카’ ‘세상을 바꾸는 기술의 탄생지’로 부른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모순의 동네, 바로 실리콘밸리이다.

엘리자베스 홈즈 테라노스 창업자, 찰리 제이비스 프랭크 설립자, 샘 뱅크먼-프리드 FTX 창업자.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주목한 인물로 선정되면서 이름값이 높았었다.(사진 왼쪽부터)/포브스

1939년 휼렛패커드가 창업하면서 시작된 실리콘밸리 84년 역사에서 올해 4월은 가장 잔혹하고 부끄러운 달로 기록될 것 같다. 이달 들어 찰리 제이비스, 리시 샤, 엘리자베스 홈스 등 전 세계적 화제를 모으며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던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줄줄이 기소되거나 수감됐다. 와튼 스쿨을 졸업한 제이비스는 학자금 대출을 중계해주는 핀테크 ‘프랭크’를 설립해 525만명의 고객을 유치했고, 2021년 JP모건에 1억7500만달러(약 2330억원)에 매각했다. 하지만 이 고객 명단이 제이비스가 데이터 전문 교수에게 맡겨 만들어낸 가짜였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사기 혐의로 체포됐다. 심지어 프랭크(Frank)라는 회사 이름은 ‘정직하다’는 뜻이다. 광고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아웃컴헬스 공동창업자 샤는 고객과 투자자를 상대로 사기 행각을 벌인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았다. 끝판왕은 11년형을 받고 27일(현지 시각) 수감되는 홈스이다. 금발의 미녀 잡스로 불리던 홈스는 스탠퍼드를 중퇴하고 바이오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창업했다. 피 한 방울로 204가지 수치와 질병을 진단해준다는 그의 말에 모두가 현혹됐고 한때 그의 자산은 45억달러까지 치솟았다. 모두 다 조작이었다. 홈스는 선고 전 최후 발언에서 “앞으로 세상에 선(善)을 행하겠다”고 했다. 실제로 그럴 마음이 있다고 해도 당장은 불가능한 일이 됐다. 이게 끝이 아니다. 지난 2월에는 오지 미디어 창업자 카를로스 왓슨, 물류 스타트업 슬링크 창업자 크리스토퍼 커치너가 사기 혐의로 기소됐고 다음 달에는 스타트업 헤드스핀 공동 창업자 매니시 라크와니 재판이, 하반기에는 가상화폐 거래소 FTX 창업자 샘 뱅크먼프리드 재판이 시작된다.

에어비앤비 창업자 브라이언 체스키는 트위터에 “나이트클럽에서 갑자기 불이 켜진 것 같은 상황”이라고 썼다. 매일같이 쏟아지는 성공 스토리에 숨겨져 있던 실리콘밸리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이 문화의 본질을 ‘남을 속이고 훔쳐서라도 성공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유명 실리콘밸리 창업자들도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일론 머스크는 생산공장도 없는 상태에서 전기차 대중화라는 장밋빛 미래를 팔았고, 로켓도 만들기 전에 ‘화성 식민지 개척’을 외쳤다. 계약금을 내고 몇 년씩 기다린 고객들의 불만은 머스크를 향한 찬사에 소리없이 묻혔다. 1만5000달러에 판매한 ‘완전 자율주행’ 소프트웨어는 9년째 완성되지 않고 있다. 머스크와 사기꾼들의 차이는 ‘될 때까지 속이는 기술’이 통했느냐 아니면 먼저 발각됐느냐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항상 갈망하고, 항상 무모하라”고 했다. 잡스의 신화와 지구 반대편의 창업 성지(聖地)를 경외시하는 한국 스타트업 창업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사기와 기만으로 만들어진 성은 결국 무너진다. 마지막에 살아남는 건 진짜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