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3일 오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성과연봉제 저지를 위한 금융노조 총파업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지호 기자

박종복 SC제일은행 행장은 영국 런던의 스탠다드차타드 본사 임원들에게 ‘호봉제’를 설명하면서 진땀을 흘렸다고 했다. “이해를 못 해요. 못 알아들어요. 왜 같은 해 입사한 직원은 연봉이 매년 똑같이 인상돼야 하냐고. 무슨 그런 일이 있냐고.”

2005년 제일은행을 인수한 스탠다드차타드는 1882년부터 1910년까지 제물포 지점을 운영했고, 1968년 유럽 은행 중 처음으로 서울 사무소를 개설해 한국과 꽤 인연이 있다지만 호봉제는 괴상했던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박 행장은 “SC은행이 전 세계 59개 나라에 진출해 있지만, 호봉제가 있는 나라는 한국뿐”이라고 했다. “적당한 영어 단어를 찾다 포기하고 ‘hobong’이라고 한국어 발음대로 쓰고 있다”고 했다.

금융지주 회장과 은행장을 바꾼다고 은행이 달라지지 않는다. 사외이사 물갈이로 될 일도 아니다. 대통령이 은행의 공공성을 강조하고, 대출 이자로 서민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서둘러 대책을 내놓으라고 금융 당국이 재촉해도, 급기야 공정거래위원회까지 ‘은행 때리기’에 가세해도 그럴 것이다.

금융 당국에서 은행의 대출 금리를 낮출 방안을 고민 중이라고 한다. “인터넷 전문 은행이 일반 은행들과 제대로 경쟁하게 만들자” “새로 은행을 몇 개 더 만들자” 구구한 주장들이 나온다.

번지수가 잘못됐다.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그냥 두고는 아무것도 바꾸지 못할 것이다. 호봉제를 깨야 은행이 달라진다. 경쟁과 차등이 생겨야 고객들 사정 챙겨주고, 대출 신청서 한 번 더 읽어주고, 금리 깎아주려고 할 것이다.

한국의 은행들이 경쟁력이 없고,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에 빗대 “실버만삭스도 못 된다”는 소리를 듣는 것은 호봉제가 깨지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이 많다. 지난 2015년 ‘다보스 포럼’이란 이름으로 알려진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가 경쟁력 금융 부문에서 한국은 87위였는데 아프리카의 우간다가 81위여서 화제가 됐다. 그 나라 사람들의 은행에 대한 주관적 평가가 큰 영향을 미치는 조사였기 때문이다. 한국 은행들은 세계 10위권인 나라 수준보다 한참 뒤떨어져 있다.

연공서열식 호봉제를 근간으로 하는 회사는 민간에서는 은행이 거의 유일하다. 금융권에서도 증권사, 보험사, 자산 운용사, 저축은행 등은 연봉제를 하고 있다. 주인 없는 회사인 은행만 호봉제다. 은행원들은 경쟁도 차등도 없이 지낸다. 월급은 매년 자동으로 똑같이 오른다. 노조는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라는 구호로 호봉제를 지키겠다고 한다. 그럴듯한 말처럼 들리지만, 유독 은행만, 대졸 초임이 6000만원 안팎이고 평균 연봉 1억원을 넘긴 은행들만 그럴 이유가 있나. 희망퇴직을 하면 6억~7억원씩 쥐여주는 꿈같은 일이 벌어진다는 곳에서만 그래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7년 전에 기회가 있었다. 2016년 12월 주요 은행이 일제히 이사회를 열어 은행원 보수 체계에 성과 연봉제를 도입하는 내용을 의결했다. 당시 은행연합회가 마련한 가이드라인은 동일 직급에서도 연봉이 최고 40%까지 차이가 나도록 했다. 은행 노조들은 “살인적 노동 강도 부추기는 성과주의 확대를 반대한다”고 했다. 은행원들이 살인적 노동 강도에 시달린다고? 금융 당국에 등을 떠밀리긴 했지만, 호봉제를 깰 기회였다. 하지만 박근혜 정부가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 물거품이 됐다. 은행장 바꾼다고 은행이 달라지지 않는다. 호봉제를 그대로 두고는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