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회는 지난 6월 탄소국경조정제도(탄소국경세) 도입 법안을 통과시켰다. 탄소 배출량이 많은 국가에서 생산·수입되는 제품에 추가 관세를 부과한다는 내용이다. 탄소 감축에 소극적인 나라의 제품에 강제 부담금을 매기는 것으로 내년부터 시범 시행에 들어가 2025년부터 본격 실행한다는 계획이다. 초안보다 강화된 내용으로 통과된 게 특징이다. 당초 철강·알루미늄·시멘트를 비롯한 5개 항목을 우선 적용 품목으로 적용할 계획이었지만 플라스틱·유기화학품·수소·암모니아 등 4개를 추가했다. 또 초안에서는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만 부과 대상으로 삼았지만 6월 통과된 수정안에서는 제품 생산에 쓰인 전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까지 포함시켰다. 제조 공정에서 나오는 직접 배출량에 대한 관세만으로도 상당한 부담인데 간접 배출량까지 따진다는 것이다.

탄소국경세가 부과되면 수출 기업 입장은 그만큼 제품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져 타격을 입는다. 무역협회 집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최근 3년간 연평균 유럽연합(EU) 수출액 가운데 이들 9개 품목이 차지하는 비율은 15.3%에 이른다. 우리 기업 입장에서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이다. 게다가 우리나라의 2020년 탄소배출량은 1990년 대비 124.8% 증가했다. 미국(-7.3%), 영국(-49.1%), 독일(-41.3%), 프랑스(-27.0%) 등 선진국에서 배출량이 줄어든 것과 대비된다. 우리나라는 작년에도 탄소 배출량이 전년보다 3.5% 늘었다. 탄소국경세는 미국도 추진하고 있다. 한국은행 예측으로는 EU와 미국이 탄소국경세를 부과할 경우 한국의 수출은 연간 1.1% 감소한다.

이처럼 해외에서 탄소 규제 강화를 통한 무역 장벽이 차곡차곡 세워지고 있지만 우리 탄소 정책은 지지부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문재인 정부가 원전을 배제하고 재생에너지를 무리하게 확대하는 내용의 탄소중립 계획을 내놓은 탓이 크다. 윤석열 정부가 원전 확대 등으로 전 정부의 탄소중립 계획을 수정하는 작업을 진행 중인데 세부 계획은 내년부터 나올 예정이다. 해외에서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탄소 규제에 대비할 시간을 허비한 꼴이 되고 말았다. 해외 탄소 규제는 국내 기업 혼자서 대응하기 어렵다. 정부가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문 정부는 30년 후 실현이 될지도 모르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놓으면서 당장 눈앞에 닥친 탄소 규제에 대한 대책 마련에는 소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예를 들어 문 정부가 철강업계에 탄소중립 방안으로 제시한 수소환원 제철기술 등의 상용화는 이른 시일 내에 현장에서 구현되기가 어려워 세계의 탄소 규제 시간표를 감안하면 당장 탄소를 감축할 수 있는 ‘징검다리 기술’ 개발이 필요한데도 문 정부가 이를 고민한 흔적은 잘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산업계와의 논의가 충분하지 않았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탄소중립 추진 전략과 단계별 목표를 제조업이 많은 우리 산업 현실에 맞게 다시 짜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도 더 이상 전 정부 책임론만 들고 나와서는 안 된다. 탄소중립 정책을 컨트롤하는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는 현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넘도록 아직 조직 정비조차 끝나지 않았다. 탄소중립에 대한 현 정부의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가 나오지 않도록 정책 수립에 더 속도를 내야 한다. 시간이 지체된 만큼 머뭇거릴 새가 없다. 환경 문제는 진보 진영의 전유물이 아니다. 안정적이고 점진적인 변화를 통해 경제성장과 환경을 두루 챙길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