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집에서 자다가 갑자기 숨진 C사 소속 택배 기사 정모(42)씨는 8년 차 기사였다. 매일 14~15시간씩 일평균 400여개를 날랐다고 한다. 주 6일 70시간 넘게 일하면서 가장의 책임을 다하려 노력했다. 그에겐 초등생·유치원생 자녀가 있었다. 세상을 떠난 날은 5월 4일. 다음 날 어린이날을 맞아 오랜만에 가족 나들이를 계획한 상태였다. 사인은 과로사로 추정된다.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택배 기사들은 하루 평균 12.7시간, 월평균 25.6일을 일하고 월 순수입으로 302만원을 올리고 있었다.

22일 오전 서울의 한 택배 물류센터에서 택배기사들이 배송 준비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칸 영화제 감독상을 두 번 받았던 켄 로치의 최신작 ‘미안해요 리키’는 영국 택배 기사의 삶을 다뤘다.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 택배 기사가 수취자 부재 시 남기는 메모다. 주인공은 전 직장에서 해고된 뒤 택배 기사로 재출발한 중년 남성 리키. 성실성은 그의 무기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쉬지 않고 트럭을 몰고 상품을 나르면서 겨우 생계를 꾸려가지만 세상은 녹록지 않다. 압권은 마지막 장면. 배달하다 강도를 만나 물건을 뺏기고 만신창이가 된 리키가 다음 날 가족들 만류를 뿌리치고 다시 트럭을 몰고 일터로 나간다. 다쳤다고 쉬면 당장 수입이 끊기고 차후 택배 물량 배정에서도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영국 택배 업계 실태를 잘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는데 물론 영국만의 일은 아니다.

전자상거래 시장이 급성장하면서 택배 시장도 급격하게 커졌다. 우리 국민 1인당 연간 택배 이용 횟수는 2000년 5회에서 2019년 99.3회로 폭증했다. 그 추세는 코로나 이후 더 가속화했다. 늘어난 주문량을 제때 소화하려면 택배 기사들이 더 많이 들고 더 빨리 뛰는 수밖에 없다. 팽창한 시장을 잡기 위한 경쟁은 ‘새벽 배송’ ‘총알 배송’ ‘치타 배송’ ‘번쩍 배송’ ‘로켓 배송’ 같은 선전 문구로 요약된다. 올 들어 국내 3대 택배 업체 매출은 일제히 역대 최고를 기록하고 있지만, 희생도 늘었다. 올해에만 택배 기사들이 숨진 사례가 11건 보고됐다.

택배 기사는 특별한 기술을 요구하지 않는다. 몸 성하게 물건 들고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으면 된다. 서울노동권익센터가 설문 조사해보니 택배 기사로 일하게 된 계기는 전문성 없이 쉽게 구할 수 있다(46.4%)거나 당장 수입이 필요(31.0%)한 경우 등 88.6%가 비자발적 선택이었다. 노동강도는 세지만 견딜 만하면 남고 못 견디면 탈출하는 체계다. “싫으면 관둬라. 너 말고도 할 사람 많다”는 식이다. 이런 일자리는 주변에 널렸다. 대리 기사, 신용카드 회원 모집인, 아파트 경비원, 청소 노동자, 가사 도우미…. 이 사회가 굴러가기 위해 저임금에 보이지 않는 노동을 감수하는 ‘특수 고용’ 노동자들이다. 이른바 ‘고자다(고르기 쉽고 자르기 쉽고 다루기 쉬운)’에 해당하는데 그 인원이 200여만명에 달한다.

정치권에선 택배 기사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기업을 압박하고 윽박지르고 있다. 그런데 그런다고 해결될까. 업계 1위 택배 업체 순이익률은 최근 5년간 0.49~1.12%였다. 택배 기사 처우를 개선하고 업무 강도를 낮춰주고 싶지만 그러려면 운임을 인상하는 수밖에 없다. 그럼 그동안 편하게 싼값에 배달을 즐겼던 소비자들이 불편해진다.

정말 문제는 이런 택배 기사 고충도 4차 산업혁명이란 거대한 물결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무인(로봇·드론)배송이 본격화하면 택배 기사들 설 자리는 좁아진다. IMF 연구원들은 앞으로 50년 동안 택배 기사를 비롯한 저숙련 노동자 실질 임금은 40% 하락하고 GDP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5%에서 10%로 감소한다고 전망했다.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복지혜택에서 소외된 대규모 노동자 집단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떠오를 날이 머지 않았다. 이런 이들에게 지속 가능한 사회 안전망을 마련해주는 노력은 다 같이 고민해야 할 숙제다. 모든 짐을 기업에 떠넘기는 건 부당할 뿐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