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노벨 평화상 수상자 마리아 레사 기자를 2018년 6월 포르투갈의 소도시 에스토릴에서 열린 세계편집인포럼(WEF)에서 만났다. 바로 전날 밤 필리핀 민다나오에서 총격으로 사망한 동료 기자에 대한 위로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기억난다. 레사 기자와 마찬가지로 수년간 두테르테 정부의 비리와 측근 정치에 대한 쓴소리를 이어온 이였다. 20여 명의 기자가 모인 방에서 누군가의 즉석 제안으로 희생자를 위한 묵념을 했다.

노벨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필리핀의 마리아 레사.그는 필리핀 온라인 매체 '래플러'의 발행인으로 필리핀 두테르테 정부의 권위주의를 폭로했다/AP연합뉴스

레사 기자와 그가 편집장인 온라인 매체 래플러(Rappler) 기자들은 2011년 두테르테 당시 다바오 시장의 무자비한 범죄 소탕 정책을 비판하면서 핍박을 받기 시작했다. 래플러의 기사는 가진 자와 외세를 두둔하고 영웅을 욕보이는 ‘가짜 뉴스’ 취급을 받았고, 사회 혁신에 역행한 ‘반동 저널리즘’으로 낙인찍혔다. 두테르테가 대통령이 되자 그의 측근들이 장악한 검·경·사법 기관은 래플러 기자들에 대해 명예훼손과 탈세, 외환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압수수색과 소환 조사, 구속을 반복했다.

레사 기자와 동료들은 “가장 괴로웠던 건 두테르테를 지지하는 시민으로부터 받은 박해(persecution)”라고 했다. 페이스북·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와 이메일·문자 등을 통해 ‘쓰레기 기자’ ‘기생충’ ‘민중의 적’ 같은 비난과 모욕, 협박이 쏟아졌다. 기자 개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구까지 표적이 됐다. 직장에서 따돌림을 당한 친지가 “제발 그만두라”고 애원을 할 땐 기자로 살아온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절망을 느꼈다고 한다. 적지 않은 기자들이 다른 길을 택했다.

레사 기자의 이야기를 더 이상 ‘남의 이야기’로 치부하기 어려운 세상이다. 3년 전 레사와 동료 기자들은 “인터넷과 소셜미디어를 통한 정보의 확증 편향, 정치적 양극화가 심해지며 자기 확신에 빠진 권위주의 정권과 대중 독재가 등장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며 “저널리즘의 겨울이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인권 변호사와 과거의 민주 투사들이 이끄는 나라에서 그 경고가 현실화할 수 있을 것이라곤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80여 년 만에 기자에게 주어진 노벨 평화상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한다. 열광적 지지를 바탕으로 공정한 사회를 실현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려 하는 정치 지도자와 그 지지자들이 볼 때 이를 비판하는 기자는 ‘옳은 일’에 반기를 들고, 혼란과 갈등을 초래하는 존재일 것이다. 레사 기자는 자신의 저널리즘을 ‘인권’이나 ‘투쟁’ 같은 말로 치장하지 않았다. 그저 “권력의 잘못을 봤고, 양심과 지성에 따라 행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저널리즘의 신념(faith)을 잃으면, 약자의 평화는 사라진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