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6일(현지 시각) 미 연방 의회 의사당 인근 건물에서 전·현직 의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연례 행사가 열렸다. 민주당 키어스틴 질리브랜드 상원의원(왼쪽)이 행사 도중 연설하고 있는 모습. 맨 오른쪽은 공화당의 존 코닌 상원의원. /전직연방의원협회(FMC)

미 의회 현장을 취재할 때마다 의례적으로 듣는 표현이 ‘초당(超黨)적 협력’이다. 다른 정파가 이해 득실을 넘어 더 큰 목적을 위해 함께 일한다는 뜻이다. 갈수록 양극화되는 미 정치와 거리가 먼 표현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입법 과정을 보면 말뿐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한국에선 ‘멸종’되다시피 한 다른 당과의 협력 사례를 최근 한 행사에서 접했다.

“언제든 그 사람과도 함께 일할 수 있습니다.” 미 전·현직 의원들이 모이는 연례 행사에서 민주당 키어스틴 질리브랜드 상원의원이 공화당의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을 언급하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질리브랜드 의원은 민주당 지지세가 가장 강한 주(州)인 뉴욕이 지역구다. 그런 그가 강성 우파인 그레이엄과의 ‘협력’을 언급하자 참석자들이 농담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농담이 아니다”라고 했다.

질리브랜드 의원은 10년 전부터 군(軍) 성폭력 사건을 독립 검사가 수사하는 법안을 발의해왔다. 성폭력 문제를 은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지휘관의 기소권을 박탈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법안을 선봉에서 반대했던 사람이 그레이엄이었다. 공군 법무관 출신의 그레이엄은 “군 지휘 계통을 엉망으로 만들게 될 것”이라고 했고, 결국 이 법안은 번번이 폐기됐다. 미 언론들은 둘을 의회 내 대표 ‘정적’(政敵)으로 묘사해왔다.

그런 두 의원이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선 힘을 합쳤다. 2년 전, 직장에서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법정 밖 ‘3자 중재’를 의무화해 놓은 취업계약서 조항을 무효화하는 법안을 공동 발의한 것이다. 사사건건 부딪쳤던 두 의원이 대화를 통해 이 사안에서만큼은 의견이 같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한다. 이듬해 2월 압도적 찬성으로 법안이 통과됐다. 두 앙숙의 ‘의기투합’으로 성폭력 피해자들이 자유롭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됐다. 질리브랜드는 당시 협력을 언급하면서 “입법으로 미국인들에 봉사한다는 목적엔 민주·공화가 다른 점이 없어야 한다”고 했다.

이렇게 미 의회에선 대부분 법안들이 양당 의원들의 물밑 대화를 거친 이후 발의된다. ‘상대당과의 협의’ 없인 폐기되기 마련이다. 다른 당 의원과 법안을 공동 발의하기 위해 1년간의 설득을 거치는 경우도 봤다. 양당간 ‘전면전’이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개별 의원들 간 협력은 계속된다. 법안 통과율이 3%에 불과한 미 의회에서 입법 성과를 내기 위해 적들이 함께 일하는 방법이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공화당 마이클 매콜 하원 외교위원장은 “특히 초선들은 상대 당과 날을 세워 지지자들의 ‘점수’를 따고 싶어 하기 마련”이라며 “이들에게 상대 당과 대화하지 않으면 결국 아무 결과도 못 낼 것이라고 말해준다”고 했다. 극단의 진영 논리에 갇혀 문제 해결 능력을 상실한 지 오래인 한국 의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