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맨해튼에서 열린 한 외교단체 만찬에 갔다. 드레스 코드가 ‘블랙 타이 양복’이어서 5년 전 아이 돌잔치 때 입었던 20만원짜리 검정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가보니 서로의 옷차림에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성 호스트와 진행자들은 드레스를 입었지만 머리를 질끈 묶거나 안경을 썼고, 외교관과 기업인들도 재킷만 갖춰 입은 채 서로 정보를 나눴다. 세계 패션 수도 뉴욕에서도 패션쇼 모델이나 메트 갈라의 셀럽들 말곤 완벽하게 빼입은 사람을 보기 쉽지 않다.

메르켈 독일 전 총리와 김정숙 여사.

경륜 많은 엘리트일수록 브랜드가 드러나는 값비싼 명품이나 지나치게 신경 쓴 듯한 차림새는 지양한다. 독일을 이끈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는 16년간 색깔만 다른 똑같은 디자인의 재킷을 돌려 입었다. 매들린 올브라이트 전 미국 국무장관은 기성복 위에 보석이라고 하기도 뭣한 각종 저렴한 브로치로 외교 메시지를 전했다. 세계 최대의 부를 일구는 실리콘밸리 기업인들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카키색 반팔 티셔츠에 플리스 재킷 한 장 걸치고도 해외 군사·경제 원조를 받아낸다.

김정숙 여사의 옷값 논란에 문재인 대통령 지지자들은 “영부인의 옷차림도 외교이고 국격”이라고 항변한다. 그러나 소위 ‘패션 외교’는 여성이 외모로 존재를 증명해야 했던 시대의 산물이다. 요즘은 미국 퍼스트레이디나 부통령도 취임식에서 어떤 디자이너를 선택했느냐가 잠깐 화제 될 뿐, 그 이후엔 부적절한 의상만 아니라면 무엇을 왜 입었는지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더구나 지금은 3년째 코로나 팬데믹에 유럽의 전쟁까지 겹쳐 세계가 원자재와 식량 부족으로 신음하는 때다. 한국 대통령 부인이 한글 박은 샤넬을 입었건, 인도의 호랑이 사랑을 배려한 까르띠에 브로치 비슷한 것을 달았건 유력 외신들이 보도하는 것을 본 적 없다. 그런 건 청와대 보도자료에나 시시콜콜 나오는 미담이다. 우리 정부가 국격을 높이는 길은 한미동맹을 강화하고, 반도체·전기차 배터리 기업을 지원하고 제2의 오징어 게임이 나오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번 논란으로 이른바 진보 진영이 여성을 소비하는 방식이 얼마나 퇴행적이고 위선적인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취임 직후 문 대통령과 참모들은 와이셔츠 차림에 커피를 들고 국정을 논하고, 대통령 부인은 청와대 뒤뜰서 딴 감으로 곶감 만드는 모습을 홍보했다. 독신인 전임 대통령에 비해 이런 게 ‘정상적 가정’이며 ‘바람직한 여성상’이라고 설교하는 듯했다. 이어진 것이 대통령 부인의 현란한 해외 패션쇼였다. 여성의 본분은 일하는 남편의 곁을 꽃처럼 장식하는 것인가. 남편의 지위로 얻은 재물로 치장하는 게 무슨 본보기라도 되나. 열심히 일하고 살림하며 진정한 성평등을 이루려는 여성들로선 불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