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한국 쌀은 단순한 식량이 아니라 선물입니다.”

지난 8월 말 방문했던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한 국내 실향민 캠프에서 들었던 말이다. 에티오피아를 포함한 4~6국으로 지난 2018년부터 한국 정부가 유엔세계식량계획(WFP)을 통해 쌀을 나누고 있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쌀밥이지만, 최근 40년 사이 가장 심각한 가뭄을 겪는 그곳에서는 식량 이상의 의미를 갖는 것 같아 귀국한 후에도 한동안 밥상 앞에서 그 말이 떠올랐다.

3억4900만명. WFP가 구호 및 개발 지원 활동을 펼치는 82국에서 현재 심각한 식량 위기를 겪는 인구다. 이 숫자는 올해 초 이미 2억8200만명에 달했지만, 반년여 만에 6700만명이 더 늘어났다. 대한민국 인구보다 많은 사람이 당장 음식을 먹지 못하면 건강과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처지에 새로 추가된 것이다. 필자가 WFP에 들어온 2003년 이래로 가장 많은 숫자다. WFP는 올해를 ‘전례 없는, 현대사 최악의 식량 위기’로 규정했다.

5000만명. 심각한 식량 위기 인구 중에서도 기근(Famine) 위기에 직면한 숫자다. 이들은 말 그대로 당장 식량을 주지 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운 상태다.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남수단 등이 특히 위험한 국가들이다. 5년 전보다 10배 늘어났는데, 최근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

6000만명. 올 연말 심각한 영양부족을 겪을 전 세계 아동 숫자다.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인 2019년 연말에 이 숫자는 4700만명이었다. 영양실조를 겪은 아이는 이른 나이에 사망할 확률이 건강한 아이의 12배로, 생존하더라도 평생 건강과 신체 발달에 지장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전 세계적인 식량 위기가 지금보다 더 나빠질 거라는 점이다. 올해까지는 충분한 식량이 생산됐음에도 물가 폭등으로 구입이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쟁과 기후 위기, 팬데믹, 불경기가 식량 생산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더 큰 위기가 올 수 있다. 최근 소폭 하락했지만, 올해 전 세계 식량 가격은 최근 10년 사이 가장 비싼 수준이다. 식량 물가가 최소 15% 이상 상승한 국가만 53국에 달한다. 2007~2008년 ‘조용한 쓰나미’라고 불렸던 전 세계적인 식량난과 2011년 아랍의 봄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식량 위기가 곳곳에서 재현될 정황이 나타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가능한 대책들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전 세계 최대 인도적 지원 기관인 WFP는 현재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 자본, 정부·기업·NGO 파트너십을 가장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빠르게, 대규모로 집중하고 있다. WFP는 긴급 식량 및 현금 지급, 영양 지원 활동을 중심으로, 수백만 명의 생명을 구하고 국가와 사회의 안전망을 구축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자연 재난을 최대한 예측하고 피해를 줄이는 기후 위기 선제 대응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예견되는 위협이 실제 위기로 이어지기 전에’ 한발 앞서 예방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나 식량 위기 인구는 갈수록 늘어나는데 인도적 지원을 위한 자금은 말라가고, 동시에 식량과 수송 비용은 치솟는 상황이다.

배고픈 에티오피아 사람들의 말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식량이 선물 같던 시절이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채 가시지 않은 1963년 대한민국에 큰 홍수가 들이닥치자, WFP는 이듬해부터 전국에서 식량·영양 지원, 기반 시설 재건 사업 등을 진행했다. 그리고 불과 20년 만에 우리는 배고픔을 극복하며 WFP 지원에서 졸업했다. 한국은 한때 WFP의 도움을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전 세계 10위권 규모의 도움을 주는 나라로 거듭났다. 이제는 우리가 일궈낸 희망과 성장의 기회를 더 많은 지구촌 이웃에게 나눠야 할 때다. 미뤄서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식량은 평화로 가는 첫걸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