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퇴계, 고종, 박정희…. 소위 ‘역사학자’ 김준혁씨 입을 거치면 모두 ‘성에 미친 인간 말종’이 됐다. “방송에서는 들려드리기 어렵다. 시청자분들의 양해를 바란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래도 그는 당선됐다.

보수 인사가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다들 안다. 후보 사퇴는 당연하고, 당 지지율이 폭락했을 것이다. 민주당 인사들의 성희롱, 성폭력 사건은 너무 많아 쓰기도 힘들다. 이 지경인데도 여성계는 참을 인(忍) 자만 300개쯤 그리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럴까. 김준혁 망언을 접한 이화여대 대응 방식에 그 힌트가 있다.

유튜브에서 조선 정조 임금의 부인 원빈이 요절한 이유에 대해 설명하는 김준혁(경기 수원정) 더불어민주당 후보.

“초대 총장 김활란이 낙랑클럽을 만들어 이화여대 학생들을 성 상납시켰다”는 발언이 드러나고 이대 동문, 교수, 재학생이 시위에 나섰다. 현장 사진을 보면 시위 참가자들은 주로 중년과 노년 여성들이었다. 총동창회가 1만명 이상의 ‘김준혁 사퇴’ 서명을 받았다는데, 파급력은 약했다. 탈북한 이대 졸업생인 김다혜(44)씨가 삭발하고 단식 농성을 했지만, 재학생의 동조 단식, 연대 투쟁은 없었다. 그 흔한 촛불 시위도, SNS에 ‘#내가접대부냐’ 같은 해시태그, 퍼포먼스도 없었다. 한마디로 역동성이 떨어졌다. “이대 투쟁력 그것밖에 안 되냐”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학교 관계자가 이런 말을 했다. “운동권이 붙지 않아서 그렇다. 그나마 총학생회가 규탄 성명을 내준 게 다행이다.” 이대 총학생회가 낸 성명의 마지막은 이렇다. “앞으로 이화여대에 대한 부적절한 내용으로 정쟁을 확산시키는 일을 만들지 않기를 요구한다.” 순둥순둥하기도 하여라.

그러자 ‘판 뒤집기’가 시도됐다. 재학·졸업생으로 구성된 ‘역사 앞에 당당한 이화를 바라는 이화인 일동’ 10여 명이 이렇게 주장했다. “김활란은 공인된 친일 반민족 행위자다. 이대의 진정한 자부심과 자긍심은 김활란의 잘못을 규명하고 그의 악행과 결별하는 것이다.” 접대부 주장을 ‘친일’ 프레임으로 물타기했다. 한의사, 여성주의자이며 친북적 행태로 유명한 이 대학 73학번 고은광순씨도 이 때 나섰다. “이대 정외과에 다니던 1935년생 이모가 김활란 성 상납의 피해자였음을 알게 됐다.” 이대는 고은씨 주장이 허위임을 밝혔다.

이화여대 동문들이 지난 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이화여대 정문 앞에서 열린 김활란의 친일-반여성 행각을 직시하며 역사 앞에 당당한 이화인을 바라는 기자회견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여성운동권은 판이 작고, 그 안에서 위계질서, 연대가 남자 못지않다. 밥 문제와도 관련 있다. 여성계에 할당된 자리와 지위, 그걸 나눠 받으려면 다른 소리를 내기 어렵다.” 위안부 운동을 더럽힌 윤미향씨에게 여성계가 바른 소리를 하지 않았던 이유, 안희정 지사·박원순 시장의 권력형 성폭력 사건에 여성운동들이 보인 ‘피해호소인’성 반응이 ‘밥그릇’ 논리로는 이해가 된다.

그럼 평범한 20대는 왜 분노하지 않는가. “역겹고 더럽지만 꼰대들 다 비슷한 거 아닌가.” “페미니스트 학자가 당시 여성 착취, 성 상납이 있다고 했다.” 젊은 여성들의 ‘바이블’ 격인 여성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이미 ‘성 접대=팩트’라는 신념이 퍼져있었다. 김준혁 발언이 사실이 아니더라도, ‘여가부 폐지’ 다섯 글자를 공약이라 내놓았던 국민의힘이 아니라 민주당에 ‘200석’을 챙겨주겠다는 결심이 서 있었다. 보수당은 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혜택 뿌릴 궁리 대신 ‘반보수’의 원인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

이런 질문을 해본다. 자신도 안 챙기는 그녀들의 명예를 굳이 남들이 챙겨줘야 하나. 그래야 한다. 멀쩡한 대학과 구성원의 명예를 더럽힌 발언은 반드시 심판받아야 한다. 목격자가 나서주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는 그저 진영의 강자가 약자를 짓밟는 동물의 왕국이 되기 때문이다. 이미 반쯤 그렇게 되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