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재단과 조선일보가 공동기획한 '12대 88의 사회를 넘자' 3회에 실린 구두공 송모(75)씨의 손. 50년간 서울 곳곳의 구두 공장에서 일해온 그는 곡선으로 휜 구두 밑부분에 단단한 가죽을 정확하게 본드로 붙이는 작업 등을 오래 하다 보니 관절이 휘고 피부 곳곳이 벗겨졌다고 했다. /장련성 기자

전태일 재단은 그 흔한 스타벅스 하나 없는 창신동 봉제골목에 있었다. 서울시가 청계천 변에 세운 전태일 기념관에 재단이 있는 줄 알았다고 하자, 한석호는 “전태일이 봉제사들 곁에 있어야지 어딜 가느냐”며 하회탈처럼 웃었다. 뼛속까지 노동자인 그는 전태일 재단의 사무총장이다.

우리는 지난겨울 처음 만났다. 폭설이 내린 날 한석호는 사뭇 긴장된 표정으로 조선일보 본사를 찾아왔다. “고작 조중동과 인터뷰 안 하는 걸 원칙으로 여기는 진보의 외투를 벗겠다”고 선언해 민노총을 발칵 뒤집은 그였지만, 평생을 강성 투사로 살아온 이가 보수 언론의 문턱을 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노동의 이중구조 문제에 보수도 따뜻한 관심을 가져달라”는 한석호의 호소가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윤석열 정부의 상생임금위원회에 참여했다고, 조선일보와 만났다고 온갖 뭇매를 맞았지만, 인터뷰 직후 노동시장의 양극화로 신음하는 88%의 저임금 근로자 실태를 조선일보가 특별취재팀을 꾸려 심층 보도하겠다고 하자 그는 만세를 불렀다. 전태일 재단과의 공동 기획 ‘12대88의 사회를 넘자’의 시작이었다.

첫 회가 나온 3월 5일, 한석호는 전화통에 불이 났다며 흥분했다. 전태일 재단과 조선일보가 어떻게 손을 잡았느냐는 질문이 압도적이었단다. 고용노동부와 상생임금위원회, 국민의힘과 서울시로부터 대안을 논의해 보자는 연락이 줄을 잇는다고도 했다. 창립기념일을 맞은 한국노총 행사장에서도 온통 ‘12대88′ 얘기뿐이었다고 했다. 비판도 있었다. 민노총은 “이 땅의 모든 노동자를 모욕했다”며 비난했고, 몇몇 시민 단체는 음모론을 제기하며 규탄 성명을 냈다. 그러나 한석호는 껄껄 웃었다. “저는 도무지 굽혀지지가 않는 유형이라서요.”

4명 남은 ‘전태일 친구들’이 고집불통 한석호의 든든한 ‘빽’이었다. 불붙은 전태일의 몸을 겉옷으로 덮어 끄며 울부짖었던 동료 재단사 최종인은 “우리 태일이의 소망을, 어머니 이소선의 정신을 살아생전 조선일보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떤 욕을 먹더라도 흔들리지 말라”며 응원했다고 한다.

서울시 동대문구 창신동 봉제골목에 자리한 전태일 재단. /김윤덕 기자

한석호가 전태일 재단 사무총장직에서 사퇴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 그로부터 20여 일 후였다. 조선일보와의 공동 기획을 재단 이사회 동의 없이 진행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사장이 동의한 사실을 이사회가 몰랐다는 걸까. 설령 사실이더라도 근신 정도에 그칠 일이 사퇴로 번진 건 강성 노동계의 압력을 재단이 견디지 못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한석호는 장문의 소명서를 남기고 물러났다. “전태일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했습니다. 오로지 어린 여공들의 처우를 개선한다는 일념만으로 물불 가리지 않다 산화한 전태일입니다. (조선일보와의) 공동 기획에도 응했을 것입니다. 독재자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고, 당시엔 보수 언론이었던 경향신문 기자에게 매달려 ‘골방에서 하루 16시간 노동’ 기사를 싣게 했습니다. 그 전태일의 절반이라도 채우다 죽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진영과 노사의 그물망에 개의치 않겠습니다.”

피 끓던 20대, 체제를 전복시키고 싶었다는 한석호는 민노총 위원장도 될 수 있었던 인물이다. 거대 노조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하청 근로자와 영세 상공인들의 고통을 눈감고 외면했다면 그는 투사의 훈장을 달고 지금쯤 국회의원이 돼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석호는 편한 길을 가지 않았다. 평생을 막노동자로 산 아버지 때문이었다. 70년대 중동 사막의 건설 현장에도 있었던 배관공 아버지는 “하루의 ‘노가다’가 끝난 뒤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시고 싶어 호프집에 들어섰다가도 올망졸망 자식들 얼굴이 떠올라 되돌아 나오던” 가장이었다. 늘 후줄근한 점퍼 차림의 아버지가 시내를 걷다가 “저 삘딩, 내가 지었다”며 뿌듯해하던 모습이 한석호에게 노동의 가치, 소금 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했다. 투쟁 일변도의 노동운동을 버리고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한 이유다.

빈 속에 깡소주를 들이붓고 있을 한석호가 걱정돼 전화를 걸었다. 나는, 연 4000만원 활동비로 네 식구를 감당하면서도 상위 50%라며 미안해하던 한 가장의 일자리를 잃게 했다. 증오와 혐오의 정치가 극으로 치닫는 사회, 타협과 양보는 없고 서로를 죽이려는 검투의 장이 된 대한민국에 ‘전태일 정신’을 두루 퍼뜨리겠다는 한 노동운동가를 응원하겠다는 얄팍한 공명심으로.

그러나 전화기 너머 한석호는 씩씩했다. “백의종군 하려고요. 이제 겨우 한 걸음 뗀 거 끝장을 봐야죠. 말했잖아요. 나란 놈은 도무지 꺾이지 않는 유형이라고, 하하하!”

지난 1월 9일 조선일보 본사를 찾은 한석호 전태일재단 사무총장. 그는 "노동의 이중구조, 임금의 양극화로 고통받는 저임금 노동자들과 영세 상공인들에게 보수도 따뜻한 관심을 보여 달라"고 호소했다. /이태경 기자